하나님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
- sangbum6365
- 2022년 1월 25일
- 5분 분량

본문: 마태복음9: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태복음9:13).
하나님은 긍휼을 원하시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 그 이유는 제사는 하나의 의식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런 행위로는 인간의 죄가 도말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긍휼은, 죄로 말미암아 죽게 생긴 인간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것이다. 사실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소와 양을 잡아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게 하였던 것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게 하시려고 예행연습을 미리 시키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뜻과는 달리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조건 성전에 나가서 소와 양을 잡아 하나님 앞에 제사만 드리면, 그것으로 자신의 모든 죄가 도말되는 줄 알았다. 여기서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얼마나 다른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인간이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율법도 자신의 의(義)를 쌓는데 썼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율법아래 가두어 놓기 위함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리어 율법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믿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이런 잘못된 생각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하나님과 원수만 되고 마는 것이다. 실지로 이런 일은 사실로 나타나서, 예수가 이스라엘 땅에 오셨을 때, 유대인들은 그를 이단의 괴수라며 십자가에 못박아 죽는데 내어주고 말았다.
하나님께서는 유대교 이천년 역사 마지막에 당신의 아들을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고자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된 생각으로 말미암아 모두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기한이 이를 때 아들’을 보내주시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에, 유대교 이천년 역사가 끝나자 아브라함과 약속한대로 당신의 아들을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보내주셨다.
그러자 율법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믿던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이 여지없이 예수를 배척하는 것이다. 종교지도자들이 이러고 있으니, 그 밑에 있는 교인들이야 두 말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께서 우려하던 일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예수를 배척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 그들 중에서도 예수를 찾아오던 자들이 있었으니, 율법을 거역하여 육체가 병든 자들과 로마에 붙어서 세금을 징수하던 세리와 몸을 팔아 목구멍에 풀칠하던 창기들이 예수를 찾아오게 되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을 모두 긍휼히 여겨 율법을 거역한 죄를 사해주셨다, 율법을 거역한 죄를 사함 받은 자들은 후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흘려주신 피의 은혜로 성령을 받고 하늘나라에 먼저 들어가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하신다는 말은, 소와 양을 잡아 드리는 제사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도말되지 않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율법을 거역하여 죄 아래 갇혀 있을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서 죄 아래 갇혀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것이 바로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긍휼함을 입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노력으로 율법을 지켜서 천국을 들어가려 했던 것이다.
이는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는 기독교인들이 드리는 예배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하신다. 그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예수 이름으로 드리는 예배로는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가 도말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법아래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영적인 율법’아래 가두어 놓은 다음, 기독교 이천년 역사 마지막에 당신의 아들(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내서 기독교인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독교인들에게 베풀어주시고자 하는 긍휼함이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하나님의 긍휼함을 입고 천국에 들어가기 보다는, 자신의 노력으로 율법(성령)을 지켜서 천국에 들어가겠다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예배당에 나가 예수 이름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나, 유대인들이 성전에 나가 소와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리는 것이나 이름만 다를 뿐 똑같은 과정이다. 당시 유대인들이 소와 양을 잡아 제사를 드렸던 그것이, 오늘날은 예수 이름 속에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모두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에 불과하기 때문에, 제사나 예배를 통해서는 인간의 죄가 도말되지 않기 때문에 구원에 이를 수 없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육체를 입은 예수가 오실 때까지 제사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였으며,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까지 예배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이 어떤 노력을 하지 않았어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 모두 성령을 보내주셨다. 성령을 받은 이방인들은 사단의 백성에서 하나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마음속으로 ‘성령의 법’을 따라 살아야 한다. 성령의 법이란? 신약성경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다. 그러니까 신약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기독교인들에게는 ‘영적인 율법’이 되는 것이다. 성령을 받은 기독교인들은 신약성경에 기록된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할 경우 ‘영적인 율법’아래 모두 갇히고 말게 된다.
그러나 마음이 부패한 기독교인들로서는 어느 누구도 성경 말씀대로 살지를 못한다. 그리하여 처음 성령을 받았을 때와는 달리 끝에 가서는 기독교인 모두가 성령을 거역한 죄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오늘날 기독교인 모두가 ‘성령의 법’아래 갇히고 말았다. 그런데 기독교인 어느 누구도 자신이 성령을 거역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는 신약성경을 보고서는, 유대인들이 예수 믿고 성령을 받으면 구원이라고 말하니까 자신들도 예수 믿고 성령을 받았으니까 구원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다. 다시 말해 유대인의 구원과정과 기독교인의 구원과정이 다르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다.
하나님의 목적은, 성령을 받은 이방인들 모두를 ‘영적인 율법’아래 가두어 놓은 다음, 기독교인 이천년 역시 마지막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내서, 영적인 율법아래 갇혀 있는 기독교인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처럼 율법으로 구원 받았다며,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바리새인들의 그것과 똑같이 닮았는지 모르겠다. 당시 아무리 높은 감투를 쓰고 있던 자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영생에 이를 수 없듯이, 오늘날 성령의 법아래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 또한 교회에서 아무리 높은 감투를 쓰고 있는 자라도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영생에 이르지 못한다.
이방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마음속에 죄악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예배당에 나가서 아무리 많은 예배를 드려도 그런 행위로는 마음속의 죄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기독교인들이 드리는 예배를 기뻐 받지 않으시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 아들(그리스도)이 오시기 전까지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예수 이름으로 드리는 예배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러나 아들(그리스도)이 오신 뒤로는, 예수 이름으로 드리는 예배보다는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배보다는 긍휼을 원하신다는 말은, 예배를 통해서는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거역한 죄를 사함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당신의 아들(부활하신 그리스도)을 통해서 성령을 거역한 죄를 직접 사함을 받으라는 말이다. 그래야 기독교인들도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를 해결 받고 영생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식적인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보다는,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오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성전에 나가서 소와 양을 잡아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것이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예배당에 나가서 예수 이름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나, 이는 모두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런 종교적인 행위를 통해서는,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악이 눈곱만큼도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이 보내주신 아들을 통해서 죄 문제를 해결 받으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믿는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시고자 하는 긍휼함이다.
유대인들의 이천년 동안 소와 양을 잡아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지만, 그것으로 유대인들의 죄를 도말되지 않았듯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예수 이름을 아무리 많은 예배를 드려도 그것으로는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가 도말되지 않는다. 이에 따라 당시 소와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리던 유대인들은,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를 믿어야 율법을 거역한 죄를 해결 받고 영생에 이르게 되었으며, 오늘날 예수 이름으로 예배를 드리던 기독교인들 또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어야 성령을 거역한 죄를 해결받고 영생에 이르게 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성령과 그리스도를 동일한 영으로 착각하여, 성령을 받으면 그리스도로 거듭났다고 착각하고 있는데, 성령과 그리스도는 동일한 영이 아니기 때문에, 성령만 받아서는 이방인들은 결코 그리스도로 거듭날 수가 없다.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활의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어야, 옛(속)사람이 죽고 그리스도로 거듭날 수 있다.
옛사람이 죽고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되면, 성령 아래서 살던 때와는 차원이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은 직접 체험해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리 많은 설명을 해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땅에 사는 자에게 하늘에 관한 것을 말해줘도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예수와 바리새인들이 사사건건 부딪혔던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예수께서 하늘 것을 말해줘도 바리새인들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사건건 부딪혔던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이 기독교인들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가령, 기독교인들이 고아원이나 양로원에 가서 열심히 봉사를 하고 왔는데, 그리스도께서는 네가 쌓은 의(義)로 말미암아 교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면 십중팔구는 기분 나빠서 얼굴을 붉히게 될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이 하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에서 비롯된 것들이기 때문에, 도리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하나님과 원수만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듣고 기분 좋아할 기독교인들은 한명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어느 누가 그리스도를 좋아하겠는가? 그래서 하나님, 예수님 이름은 쉽게 부를 수 있지만, 정작 인격적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쉽게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귀 있는 자는 듣고 깨달으라!-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