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안에서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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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기존에 살던 방식을 고수하며 살려고 한다. 그러다보니 될 수 있는 한, 크게 변화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한마디로 인간들이 옛것에 의지한 채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그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명령을 아무 불평 없이 행동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창12:1)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두말하지 않고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고향 땅과 친척들을 모두 버리고 낯설고 물설은 곳으로 떠났다. 하나님은 그런 아브라함을 좋게 여겼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약 2천 년 동안 힘들게 살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측은하게 생각하여 당신의 아들 예수를 보내서 그들로 하여금 “모두가 내가 보낸 아들을 믿고 그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으라”고 하셨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변화받는 것을 싫어한 나머지 끝까지 율법을 고수하다가 예수를 배척하고 멸망으로 갔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두고,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눅5:39)고 빗대어 말씀하고 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실을 모르는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율법의 행위가 곧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이 예수를 배척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런 일은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예외가 아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은 유대인들처럼 미련하게 묵은 포도주에 취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은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새 포도주에 취해 있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 역시 유대인들처럼 묵은 포도주에 취해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유대인들에게 율법이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었던 것처럼,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성령의 법(영적인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를 모르고 있는 기독교인들로서는 마음속의 죄를 깨달으라고 주신 성령의 법을 가지고 모두가 구원받았다고 믿고 있으니, 율법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믿고 있던 유대인들의 그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초대 교회부터 시작된 기독교 역사는 벌써 2천 년을 넘어서고 있다. 기독교인들도 약 2천 년 동안 성령을 따라 살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하지만 기독교인 어느 누구도 온전히 성령을 따라 살지 못한다. 성령을 따라 살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죄만 더 짓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령 주일날 티브이를 보지 말라고 했을 때 참고 시청하지 않았다고 하자. 그런데 마음속으로는 보고 싶어 환장하는 것이다. 그는 이미 마음으로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법은 마음속으로 생각만 해도 죄를 짓게 된다. 이렇게 엄한 법을 마음이 부패한 인간들이 어떻게 온전히 지키며 살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들에게는 율법의 무거운 짐이다.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할 수 없다고 성경이 그토록 강조하고 있건만, 결국 기독교인들도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죽은 영의 교묘한 술책에 속아서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하나님이 보낸 영적인 아들을 믿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눅5:38)고 했던 말씀을 기독교인들에게 적용시키면, 지금까지 성령의 법 아래서 해오던 신앙생활을 버리고 이제는 그들 앞에 새 주인으로 오시는 영적인 하나님 아들을 마음으로 믿으라는 말씀이다. 그래야만 진정한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배제하고 자꾸만 영적인 율법 역할을 하라고 보내주신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믿고 있으면, 마치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믿고 있는 것과 같은 꼴이 되고 마는 것이다. 왜 유대인들의 잘못된 것은 잘도 지적하면서 정작 자신들 것은 전혀 보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영적인 소경은 사물을 못 보는 자는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바로 보지 못하는 자이다.
오늘날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사실은 귀신도 알고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땅에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는 오직 율법 아래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범죄를 담당해 주러 오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흘려주신 피는 첫 사람 아담이 지은 원죄를 해결해 주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율법 아래 살던 유대인들은 누구든지 예수 이름만 불러도 제일 먼저 율법을 거역한 자범죄를 사함받고, 다음으로 예수께서 흘려주신 피를 통하여 원죄를 사함받았다는 증거로 성령을 받게되어 구원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예수 이름을 부르고 성령을 선물로 받은 기독교인들은 마음이 부패하여 성령의 법을 따라 살 수 없기 때문에 모두가 성령을 거역한 죄인들이다.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거역한 자범죄를 해결받고 싶어도 아직 기독교인들 앞에 영적으로 오신 예수가 없기 때문에 자범죄를 해결 받을 수가 없다. 그런데 기독교 목사들은 예수를 믿어야 구원이라고 날마다 외치고 있다. 도대체 예수가 우리 눈 앞에 있어야 내가 지은 죄를 들고 나가서 자범죄를 사함받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닌가?
성경대로 하면 예수는 지금 하늘 보좌에 계신다(히8:1). 하늘에 계신 예수를 우리가 무슨 수로 만나서 내가 성령을 거역한 죄를 지었다고 고백할 수 있단 말인가? 기독교인들의 이런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방인, 즉 기독교인들 앞에도 당신 아들을 보내주시는 것이다. 영(말씀)으로 계신 예수께서 인간들 앞에 영으로 가실 수 없기에 이방인 중에서 미리 선택한 한 사람을 통해서 가시는 것이다. 이방인들은 싫든 좋든 간에 그렇게 오시는분을 하나님 아들로 믿어야 한다. 이를 두고 ‘도적같이 오시는 그리스도’ 또는 ‘영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람을 통해서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제대로 따라 살았는지, 따라 살지 못했는지를 묻게 될 것이다. 얼핏 들으면 꼭 기독교인들의 잘못을 지적하러 오신 분 같지만 마음 문을 열고 말씀을 끝까지 들어보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기독교인들의 죄악을 지적하고 나무라는 것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손들게 하기 위해서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손을 들어야, 그리스도께서도 그 사람의 죄를 사해주고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인 중에서도 마음이 강퍅한 자들은 자신의 죄악을 지적하는 그리스도를 못마땅하게 여기거나 이단 괴수로 몰아 죽이려 할 것이다. 특히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믿고 있는 자들 또한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지 않으려 할 것이다. 이런 자들은 마음속에 죽은 영(뱀)이 있어서 지금까지 살던 방식대로 계속 살 것을 종용하며, 절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말도록 미혹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마음속에 새 주인으로 들어가고 싶어도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 속에는 절대 들어갈 수가 없다.
우리가 건강할 때는 병원을 찾지 않는다. 그러다가 몸에 이상이 생겨야 비로소 병원을 찾게 된다. 그리하여 병원에서 진찰을 받고 나서 의사가 병명이 암이라고 알려주면 그때서야 혼비백산해서 난리법석을 떤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도 당당하던 사람이 자신의 몸속에 암세포가 자라고 있다는 의사의 말에 그만 사색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는 “의사선생님! 더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하면서 그 당당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의사 앞에서 손발을 싹싹 비비며 살려달라고 할 것이다. 어느 누가 죽음 앞에서 초연하겠는가? 이것이 육신을 입은 인간의 모습이다. 한번 가면 다시는 오지 못하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어서 죽음 앞에서 인간은 비굴해질 수밖에 없다.
병으로 인하여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말에 어떤 누구라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런 환자는 의사가 무슨 말을 하든지 듣게 되어 있다. 암세포에 치명적이라 할 수 있는 술, 담배를 좋아하던 사람에게 “당신 술, 담배를 당장 끊지 않으면 죽는다”고 엄포를 놓게 되면 그는 조금이라도 더 살기 위해서는 의사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이런 사람이 자기 몸이 아프지 않는 상황에서 의사가 이런 지시를 내린다고 한다면 누가 그의 말을 듣고 술, 담배를 끊겠는가? 이것이 바로 두 얼굴을 가진 인간의 모습이다. 이런 결과로 미루어 볼 때 결국 인간은 자신에게 위급한 상황이 닥쳐야만 그제서야 말을 듣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성경을 보면 예수께서 세상 이치를 예로 들어 설명해놓으신 부분이 있다. 바로 마태복음 9장 12절에서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고 하시는 말씀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평소에 자신이 건강하다고 느끼는 자는 절대로 의원을 찾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이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느끼는 자는 의원을 날마다 찾게 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영혼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자는 영혼의 치료자이신 주님을 날마다 찾게 되어 있다. 그러나 자신의 영혼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자는 주님을 찾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병명을 바로 알려 주시려고 애쓰시는 영혼의 치료자에게 돌팔매질을 해대는 것이다.
과연 이런 자가 자신의 몸속에 암세포가 자라고 있다고 하는데도 의사를 향해서 이런 헛소리를 하겠는가? 아마 병원에서 이런 진단을 받았다면 살려달라고 의사 선생님 앞에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을 것이다. 그런데 몸뚱이보다 몇 십 배나 더 중요한 영혼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고 하는데도 어리석은 인간들은 몸뚱이만 괜찮으면 괜찮은 줄 알고 영혼을 치료해주실 주님 앞으로 나오지 않는다. “몸 밖에 걸치는 의복보다 몸뚱이가 더 낫고, 몸뚱이보다는 영혼이 더 훨씬 더 중요하다”(마10:28, 6:25~28, 눅12:33)는 말씀을 성경에서 누차 읽었음 직한 데도 인간들이 눈에 보이는 현실만 생각할 뿐 인간의 사후세계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영혼의 안내자들이라고 하는 목사들조차도 성도들에게 ‘영혼의 때를 위하여’ 살도록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눈에 보이는 육신의 때만을 위하여 살도록 가르치고 있으니 더 말하면 무엇하겠는가? 이 세상에 지음받은 온갖 만물들이야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일생을 마감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영적인 존재로 지음받은 인간만큼은 육신으로 사는 세상이 있고, 영적으로 사는 세상이 따로 있다. 그래서 인간에게만큼은 두 번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계시록에도 보면 첫 번째 죽음이 있고, 그다음에는 반드시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한다고 기록되어 있다(계21:8). 첫 번째 죽음이란 말 그대로 육신적으로 죽는 죽음을 뜻하는 말이고, 두 번째 죽음은 영으로 죽는 죽음을 두고 일컫는 말이다.
불신자들이야 이런 사실을 모르고 살지만 믿는 자들이라면 이런 사실을 믿기 싫어도 믿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믿는다면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절대 안 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영혼이 얼마나 중한 병에 걸려있는지 진단하려면 스스로 성령을 얼마나 거역하고 살았는가를 가늠해보아야 한다. 그런데 자신이 처음 예수믿고 성령을 받아서 성령을 따라 살지 못한 것은 전혀 기억을 못하면서 오로지 성령 받은 것만 내세워서 구원받았다고 한다면 형평성에도 전혀 맞지 않는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육신이 건강하다고 하여 자신의 영혼까지도 건강한 줄 믿고 있다가는 큰 코 닥친다.
기독교인들은 분명히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으로 출발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성령을 거역하고 제멋대로 살고자 할 때 유대인들처럼 몸뚱이에 병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병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마음속에 찾아온 병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누구도 그것을 찾아낼 수 없다.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병을 찾아내실 분은 오로지 하나님 아들 한 분뿐이시다. 하나님 아들은 마음속에 들어있는 병만 찾아내시는 것이 아니라 그 병을 직접 치료도 해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이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병을 진단받기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어찌나 교묘하게 거부하는지 진단만 해보자고 하는데도 온갖 핑계를 다 대면서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반강제적으로 병명을 진단받았다 할지라도 인간들이얼마나 악하고 게으른지 그것을 좀처럼 쉽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왜 병든 자냐는 것이다. 육신이 이렇게 멀쩡한데 말이다. 그러면서 영혼의 치료자 앞으로 나오기를 도무지 꺼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도 입으로는 연신 ‘주여! 주여!’를 외치고있는 것이 오늘날 믿는 자들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오늘 네 자신은 과연 어느 자리에 서 있는가?” 주님은 오늘도 나에게 이것을 묻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