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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

    한 여름 뙤약볕 아래서 일을 하고 나면 많은 땀을 흘리게 되고, 땀을 흘리고 나면 심한 갈증을 느끼게 된다. 그때 시원한 물 한 그릇은 생명수와도 같다. 인간의 몸은 70%가 수분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물을 공급받지 못하면 인간도 금방 죽고 말 것이다. 물은 인간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살아 숨쉬는 것들은 모두 다 물이 필요하다. 창조주께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 물이 필요하도록 만든 이유는, 인간들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실 목적으로 그렇게 창조하셨을 것이다

 

살아 숨 쉬는 동식물들에게 물이 필요하듯이 모든 인간들에게는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그리스도 없이 사는 자는 그 지식이 아무리 뛰어나고 총명하다 해도 하늘나라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리스도가 없이 사는 자는 헛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역사를 움직여 가시는 분은 하나님이나, 이 세상 모든 인간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시다.

 

인간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는 종교적 행위를 통해서 쟁취할 수 있는 분이 아니고, 또한 교회를 오랫동안 다녔다고 저절로 주어지는 분이 아니다. 그리고 큰 교회를 담임하고 있다고 해서 또는 성령의 은사를 충만하게 받았다고 해서 거저 주어지는 분이 아니다. 성령의 법 아래 사는 자들이 그리스도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아들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당신의 아들로 말미암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천국에 들어올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첫 번째로 율법을 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두 율법 아래 가두셨다. 그러나 어리석은 인간들은 그런 사실을 모르고 율법이 인간을 의롭게 하는 것으로 믿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약속했던 기한이 이르자 두 번째 것으로 당신의 아들을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보내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첫 번째 모형으로 주신 것만 붙들고 있다가 아들을 배척하고 말았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 땅에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 이름을 부르고 성령을 받게 되었다. 개, 돼지같이 살던 이방인들에게도 예수께서 흘려주신 피로 말미암아 원죄를 사함 받았다는 증거로 성령이 오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 주신 성령은 법도 없이 살던 이방인들에게 영적인 율법 역할을 하라고 마음속에 주신 하나님의 법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누구나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 그러나 마음이 부패한 기독교인들로서는 어느 누구도 마음속에 주신 율법을 따라 살지 못한다. 이때 기독교인들은 자동적으로 모두 영적인 율법 아래 갇히게 된다. 하나님께서도 이런 사실을 알고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율법을 주시어 그들을 성령의 법 아래 가두기 위해서다. 그래야 하나님의 영적인 아들을 보내서 성령의 법을 거역한 기독교인들을 죄에서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 지도자들은 입만 열면 율법으로는 구원받지 못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서 정작 자신들은 성령으로 구원받았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께서 예수 이름을 부르는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나타남은 이방인들로 하여금 유익을 주기 위해서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성령을 통하여 마음속을 살펴보고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을 깨달아 가는 것이 자신에게 유익이라는 것이다. 그래야 기독교인들이 장차 이방인들 앞에 오실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전서 12:7)

 

만약 예수 이름을 부르는 이방인들이 성령으로 구원에 이를 것 같았으면 바울이 ‘유익’이란 말 대신 ‘구원’이란 표현을 써야 옳았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이 ‘유익’이란 표현을 쓴 것은 아직 이방인들이 성령으로 온전한 구원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방인들이 성령으로 얻는 ‘유익’은 비록 자기 죄만 깨달아 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표적을 나타내어 불신자로 하여금 그것을 보고 예수를 믿게 하여, 불신자로 살던 자들을 하나님 백성 만드는 작업도 병행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 어느 누구도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러다보니 기독교인들 역시 유대인들처럼 율법(성령의 법)으로 구원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율법이든 성령의 법이든 법은 인간의 죄를 깨닫게 할 뿐 인간의 어느 것도 온전케 할 수 없다고 성경은 누차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줄기차게 성령을 그리스도 영으로 착각한 나머지 계속해서 그리스도로 거듭났다고 주장하고 있다. 자꾸만 성령을 그리스도 영으로 오해하게 되면 기독교인들은 스스로 마귀가 쳐놓은 올무에 빠져들고 말게 된다.

 

성령과 그리스도는 엄연히 다른 분이시다. 성령은 아버지 영이요(마20:10), 그리스도는 아들이다. 따라서 그 하시는 일에 있어서도 각각 다르다. 그런데 아버지와 아들을 같은 분으로 보게 되면, 아버지께서 아들을 인간들 앞에 보내주신 의미가 없게 된다. 물론 하나님 나라 안에 있을 때는 성령과 그리스도는 모두 하나이다. 그러나 그 하시는 일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만약 성령과 그리스도를 같은 분으로 보게 되면 인간들에게 절대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루살렘 성전을 보면 하나님이 거하시는 지성소가 있고 아들이 거하시는 성소가 있다. 이는 바로 인간의 영혼에 초점을 맞추고 성전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지성소는 하나님(성령)이 머무는 곳으로 인간의 영을 말하며, 성소는 아들이 머무는 곳으로서 인간의 마음속을 두고 하는 말이다. 따라서 아버지는 지성소에 계셔야 하고, 아들은 성소에 계셔야 한다. 만약 지성소에 계셔야할 하나님이 아들이 있는 성소에 들어오시게 되면 하늘나라의 위계질서는 무너지고 만다. 위계질서가 무너지면 인간들의 구원도 이루어질 수 없다.

 

하늘나라는 인간들이 사는 세상과 달리 위계질서가 철저한 곳이다. 루시퍼가 하늘의 위계질서를 파괴하고 자기 자리를 이탈하였다가 범죄자가 되어 하늘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령이 해야 할 일과 아들이 해야 할 일을 구분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이것도 하시고 저것도 하신다면 하나님은 스스로 하늘의 위계질서를 무너뜨리고 마는 것이다. 하물며 인간들도 집을 지을 때 기둥으로 쓸 나무를 서까래로 쓰지 않고, 서까래로 쓸 나무를 기둥으로 쓰지 않는다. 인간 세상도 이럴

지인데 설마 하나님께서 성령과 그리스도 영이 하시는 일을 같다고 하시겠는가?

 

하나님도 하늘에 계실 때는 한 분이지만, 성령으로 하시면 여러 영이 되어 각 사람 영(생각) 속에 오신다(행2:3). 마찬가지로 예수도 이스라엘 땅에 육체로 계실 때는 한분이지만, 하늘에 오르사 아버지의 영광을 입고 영적인 분이 되신 후로는 여러 영이 되어 각 사람 마음속에 오실 수 있게 되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땅에 있는 것보다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더 낫다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를 두고 하신 말씀이다(요16:7).

 

지구상의 거하는 어떤 사람이라도 예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성령이 내주하시게 되는데, 이는 예수께서 흘려주신 피의 효력 때문이다. 구약 때도 성령이 계셨지만 그때는 예수가 피 흘려주기 전이라 성령이 인간 속에 내주하지 못하고 인간의 몸 밖에서 선지자들의 마음을 붙잡고 일하셨다. 그러다가 성령이 인간 속에 내주하시게 된 계기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흘려주신 피 때문이다. 예수가 흘려준 피는 첫 사람 아담이 지은 원죄를 해결하는 능력이 있다. 마귀가 세상 임금 자리에서 쫓겨난 것도 모두 예수가 흘려준 피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받아 원죄를 해결 받았다고 해서 모든 죄를 사함 받은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영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의 법을 거역한 자범죄를 해결 받아야 비로소 온전한 구원에 들어갈 수 있다.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 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 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마태복음 22:8-13)

 

위 말씀은 바로 이방인들의 구원을 염두에 두고 기록한 글이다. 기독교인들은 현재 천국을 가기 위해서 땅에서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지 아직 천국 티켓을 손에 거머쥔 사람들이 아니다. 천국 티켓을 손에 넣으려면 기독교인들 역시 하나님이 보내주신 영적인 아들을 믿고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자꾸만 이스라엘 땅에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를 믿은 것을 두고 하나님이 보낸 아들을 믿은 것으로 착각하는데, 이방인들은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를 믿어서는 원죄만 해결되었을 뿐 아직 자범죄가 해결되지 못한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아직도 성령의 법(죄) 아래 살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영적인 아들로부터 ‘예복’을 선물 받은 일이 없다. 아직까지 기독교인들 앞에는 영적인 하나님 아들이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 역시 영적으로 오신 아들을 믿고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되면 예복을 선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들을 믿지 않고 천국에 들어간 자는 예복이 없기 때문에 결국은 천국에서도 쫓겨나게 된다. 오늘날 예수 이름을 부르는 기독교인들이 전 세계적으로 약 20억 명쯤 된다고 하는데, 이를 두고 하는 말이 바로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1)고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그리스도 영과 동일한 영으로 주장하는 근거로 다음 말씀을 예로 든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여기서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영’이란 성령 하나님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이란 말은 우리 마음속에 말씀으로 오고자 하시는 영이시다.

 

그런데 이것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 영’을 동일한 영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이런 오해가 생긴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이런 해석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직까지 기독교인 중에서 한 사람도 그리스도 영을 받아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목사인 나도 성령 아래서 살 때는 성령이 곧 그리스도 영인 줄 알았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영으로 찾아오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보니, 비로소 성령과 그리스도 영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바울이 율법 아래 살다가 빛으로 찾아오신 예수를 만나고 나서야 자신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된 것과 같은 이치다.

 

바울은 유대인 중에서 유일하게 성령과 더불어 그리스도 영을 받은 사람이다. 그래서 성령과 그리스도 영을 분리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열두 제자들은 바울과 달리 예수께서 그들의 마음속의 죄를 사해주자, 성령께서 죄 없는 그들의 마음을 붙잡고 일하셨던 것이다. 이는 성령께서 죄 없는 예수 마음을 붙잡고 쓰신 것과 같은 원리다. 그래서 열두 제자들은 성령에 대해서는 자주 언급하지만 바울처럼 그리스도 영에 대해서는 자주 언급하지 않는다. 좋은 예로 바울이 기록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자주 아버지로 부르는 데 비해 열두 제자들이 기록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자주 표현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 바울을 그렇게 쓰신 것은 장차 이방인들 앞에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하기 위해서 그를 특별히 불러 세운 것이다.

 

성령이 믿는 자들에게 법을 주시고 법을 지키지 못한 인간들을 죄 아래 가두셨다면, 아들은 법 아래 갇힌 죄인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신다. 이렇게 아버지가 하시는 일과 아들이 하시는 일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이 구원에 이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를 부정하고 아버지와 아들을 동일한 영으로 보게 되면 스스로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 되어 구원에 이를 수 없게 된다. 물론 이것은 악한 영들이 아들을 못 믿게 하려고 술책을 부리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기독교인들이 이런 악한 영에게 쓰임 받아서는 절대 안 될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성령과 그리스도 영이 동일한 영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계신지 아닌지를 확인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계시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기독교인들은 목마르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을 보면 모두가 목말라 있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좋은 예로 그리스도를 모신 기독교인이라면 적어도 다른 사람들처럼 세상에서 출세하려고 발버둥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기독교인들 역시 세상 것을 붙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기독교인들이 무척 목마르다는 증거이다.

 

그럼 기독교인들이 왜 목마른지 그 이유를 살펴보자! 불신자로 살던 자가 처음 예수를 믿고 성령을 충만히 받았을 때는 자기 재산이라도 다 바치고 또 자기 눈이라도 빼줄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그때는 틀림없이 자신이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믿는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싸늘하게 식어간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신앙생활은 점점 형식적으로 변해간다. 그리고 나중에는 구원받았다는 마음도 점점 사라지게 된다. 성령이 그리스도 영이라면 절대 이런 현상이 나타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 성령 아래서는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성령은 바로 법이 없이 살던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 법을 주신 것이기 때문에, 성령을 소멸하게 되면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법을 거역한 것이 되어 믿는 자의 마음이 점점 더 황폐해진다. 마음이 황폐해진다는 말은 인간의 마음이 병들어 간다는 말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저 사람이 믿는 사람 맞아?”라고 할 정도로 심한 타락을 하게 된다. 1960~1970년대 한국교회와 현재의 한국교회를 비교해 보면 그 타락의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지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성령이 그리스도 영이라면 절대 이런 현상이 나타날 수 없다.

 

성령은 법으로 오시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제한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 법을 어기어도 제제를 가하지 않기 때문에 얼마든지 타락으로 갈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주인으로 오시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제한하여 인간이 절대 타락하지 않게 하신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말로는 성령으로 구원받았다고 하는데 정작 마음속에서는 끊임없이 앞날에 대한 불안과 근심 걱정 때문에 마음 편할 날이 없다. 말로는 모두가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는데 죽음에 대한 공포는 여전히 사람을 불안에 떨게 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혹시나 하고 이 교회 저 교회를 기웃거리는 것은 모두 영혼이 목말라 있기 때문이다. 영혼의 갈급함을 채우려고 교인들이 이곳저곳을 기웃거려 보지만, 이 세상 어느 교회 어디를 가도 성령의 법 아래서는 인간의 영혼의 갈급함을 채워줄 곳은 없다. 그러다가 마음이 조급한 자들은 아들이 오실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그만 이단에 빠지기도 한다. 결국 예수를 가장한 적그리스도 영에게 빠지면 좀처럼 헤어나기 힘들다.

 

기독교인들이 예배당에 나가서 예배드리는 이유도 알고 보면, 무엇인가 마음속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만약 기독교인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계시다면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손으로 지은 건물에 모여 예배드릴 필요가 없다. 그러나 성령은 기독교인들에게 법을 주러 오셨기 때문에 성령의 법에 따라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가 마음속에 들어오실 때까지 예배를 드리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성령의 법 아래서는 아무리 예수 이름으로 많은 예배를 드려도 절대 기독교인들 마음속이 온전케 될 수 없다.

 

이제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영혼의 갈증을 해소하려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영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기독교인의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영으로 오시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그동안 성령의 법 아래서는 죄만 짓고 살아왔다. 따라서 반드시 그리스도가 오셔서 기독교인들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셔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기독교인들도 갈증을 해소할 수 있다.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인간들은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물을 먹어야 영원히 죽지 않고 살 수 있다.

Seagu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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