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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

 

농부가 봄에 씨앗을 뿌리는 것은 여름과 가을에 풍성한 수확을 얻기 위해서다. 하나님도 농부와 마찬가지로 농사를 짓는다. 봄에 씨앗을 뿌리는 역할을 담당했던 자는 아브라함이요,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여름 실과를 거두어들이는 일을 맡았던 분은 이삭의 예표로 오신 예수이시며, 가을 추수 때 이방인들 가운데서 알곡들을 거두어들이는 일을 맡으실 분은 야곱의 예표로 오시는 영적인 하나님 아들이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 그에게 이삭과 야곱을 자손으로 주신 것은 장차 유대인과 기독교인들 앞에 보낼 하나님 아들을 미리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여름 실과 얼마정도를 거둬들였고, 이제 마지막으로 이방인들 가운데서 가을 알곡 얼마를 거두어들일 일만 남았다.

 

가을 추수가 끝나고 나면 농부가 가라지들을 모아서 불에 태우듯이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가을 알곡들을 거두어들이고 나면, 쭉정이와 가라지들을 모아서 불에 태울 것이다. 노아 때는 물로 심판하였지만 마지막 때에는 인간들의 악이 너무도 관영하여 모두 불로 태우는 것이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베드로후서 3:7)

 

농부가 추수가 끝나고 나면 알곡들만 모아서 곡간에 들이듯이 하나님께서도 이방인들 가운데서 알곡들을 수확하는 일만 남았다. 기독교인들 입장에서는 “우리는 예수 믿고 성령을 받아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인데 무슨 알곡들을 또 수확하느냐”하고 항변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현재 추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지, 아들의 손길을 통해서 주인의 곡간에 들어간 알곡들이 아니다. 기독교인들 속에는 아직도 쭉정이와 가라지가 많이 섞여 있다. 따라서 그들 속에서 알곡들을 골라내야 하는 까다로운 일이 남아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예수 믿고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들은 이미 알곡이 된 줄 알고 있겠지만, 기독교인들은 현재 예수의 피 흘림을 통하여 아담이 지은 ‘원죄’만 해결 받은 상태이기 때문에 알곡이라고 부를 수 없다. 이는 절반만 성공하고 아직 절반이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도 율법으로 의롭게 된 줄 알았지만 그들도 죄인의 몸이었다. 기독교인들이 알곡이 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되고, 반드시 이방인들 앞에 영적으로 오시는 아들을 믿어야 비로소 알곡이 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율법 아래서 약 2천년을 살았기 때문에 자신들이 곧 먹을 만한 여름 실과인 줄 알았다. 하지만 율법으로는 어느 누구도 좋은 실과가 될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할 목적으로 주신 것인데, 유대인들이 그것을 모르고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율법은 어느 누구도 지킬 수 없는 법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드시 하나님이 보내주신 아들을 통해서 죄 사함을 받아야 비로소 온전한 여름 실과가 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 역시 현재는 모두가 성령의 법 아래 살고 있는 죄인들이다. 그런데 자신들은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모두가 알곡이 된 줄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법도 없이 살던 이방인들은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아도 온전한 구원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때부터 하나님이 주신 법(성령) 아래서 백성으로서 첫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초대교회로부터 시작한 기독교 역사도 2천년이 넘었다. 하지만 기독교인 어느 누구도 성령을 온전히 따라 살자가 없다.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따라 살지 못하는 이유는 이방인들 마음이 모두 죄로 부패하여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에게 “당신이 날마다 짓는 죄는 어찌할 것이냐?”고 물으면 그것은 예수께서 우리의 죄악을 모두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우리가 죽은 후에는 예수께서 다 해결해 주신다고 믿고 있다. 참으로 그럴 듯한 생각이다. 정말로 예수께서 우리가 날마다 짓는 죄까지 모두 다 담당해 주신다면 우리가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그러나 사실이 그렇지 않기 때문에 걱정이 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알아야 할 것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거역하고 지은 죄는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께서 해결해 주시지만(이사야 53장),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거역하고 지은 영적인 죄는 이방인들 앞에 영적으로 오신 아들을 통해서 해결 받아야 한다. 이를 쉽게 설명하면 율법 아래 살던 유대인들에게는 육체로 오신 예수를 믿어야 구원이고, 성령 아래 살고 있는 영적인 백성들에게는 영적으로 오신 아들을 믿어야 구원이다. 이 또한 하나님이 정한 법칙이라 누구도 변개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했던 것은, 앞으로 구원 받을 하나님 백성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인가를 미리 보여주고 있다. 애굽은 사단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이 세상을 뜻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모세를 따라 홍해바다를 건너게 한 것은 이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리고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신 것은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 아래서 살아가야 할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까지 믿고 따르던 모세를 뒤로하고 새로운 지도자인 여호수아를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갔던 것은, 장차 하나님 백성들이 모형으로 주신 것들을 뒤로 하고, 새로운 지도자인 예수를 통해서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똑같이 이런 과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구원 여정은 마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을 탈출하여 홍해바다를 건너고, 바란 광야를 지나서 시내산에 도착해서 율법을 받은 것과 같다. 즉 기독교인들 역시 예수 이름을 부르고(홍해바다를 건넘) 성령(율법)을 받아서 현재는 하나님의 영적인 백성으로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광야생활)을 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바다를 건넜다고 해서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듯이, 기독교인들 역시 현재는 모두가 하나님 법 아래 살고 있는 죄인들이기 때문에 온전한 구원에 들어간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이 온전한 구원에 들어가려면 지금까지 자신들을 인도하던 모세(목사)를 뒤로하고, 새로운 지도자인 여호수아(영적인 아들)를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한다. 혹시 자신은 이미 가나안 땅에 도착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사단에게 속고 있는 자들이다.

 

기독교인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을 인도해왔던 지도자(목사)들을 뒤로하고 이제부터는 모두가 새로운 지도자를 따라 나서야 한다. 새로운 지도자란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시고 있는 자를 말한다. 하늘에 오르셨던 예수가 ‘빛(영)’으로 바울 마음속에 들어가셨던 것처럼, 기독교인들 앞에 오실 새로운 지도자 역시 바울처럼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자이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그를 따라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온전한 구원에 들어간다.

 

우리가 모세를 통해서 깨달아야 할 것은 처음에 성도들을 이끌었던 지도자가 끝까지 성도들을 이끌지 못한다는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시내산까지 왔지만, 그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모세는 아직도 자신의 눈과 귀가 어둡지 않다며 하나님께 강청 드렸지만, 하나님은 끝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모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즉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지도자의 모습이다(신31장).

 

마찬가지로 오늘날 성령으로 쓰임 받는 사역자들은 모세 같은 존재들이다. 그동안 전 세계 방방곡곡을 다니며 불신자들을 전도하여 예수 이름을 부르게 하여 그들에게 성령을 받게 한 것은, 마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세상)을 탈출하여 홍해바다를 건너고 시내산에 도착하여 율법을 받게 한 것과 같은 이치다. 그들의 수고와 땀방울은 하나님께서 모두 각각 기억하여, 모세처럼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실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 사역자들이 모세처럼 하나님(성령)음성을 듣고 즉시 양떼들을 여호수아에게 넘겨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성도들을 이끌었던 목사들은 더 이상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새로운 지도자에게 바통을 넘겨주어야 하는데 과연 기독교 목사들이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겠냐 하는 것이다. 성경에도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히10:9)”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아마도 자기 욕심을 내려놓지 못한 자들은 이것이 큰 걸림돌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성도가 자기 양떼라며 여호수아에게 성도들을 넘겨주지 않는 것은, 하나님에게 정면으로 도전하는 자들이다. 모세는 그 많은 백성들을 이끌고 와서도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는 못 들어간다고 하자, 군말 없이 그 바통을 여호수아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그런데 오늘날 목사들은 성도들을 자기 양떼라며 그 바통을 여호수아에게 넘겨주지 않는 것이다. 이런 자들은 성령께서 세운 목사가 아니라, 스스로 목사가 된 자들로서 삯꾼 목사이거나 거짓 목사들이다. 이런 자들은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그 밑에 있는 성도들은 어찌되는가? 여호수아를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하는데 거짓 목사들이 못 들어가게 가로막고 있으니, 그들은 결국 광야(세상)에서 이리(마귀)떼에게 물려죽고 말게 될 것이다. 그런 자들 밑에 있는 성도들은 스스로 우리를 탈출하여 여호수아를 찾아와야 한다. 그래서 말세에는 주의 종들을 잘 만나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자들이 바로 성도들을 배나 지옥 자식 만들고 있는 것이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마태복음 23:13)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성령께서 세운 종들은 모세처럼 하나님 음성을 듣는 자들이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에게 양떼들을 넘겨주라고 하면, 모세처럼 군말 없이 넘겨주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거짓 목사와 성령으로 쓰임 받는 목사의 다른 점이다.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요4:37). 지금까지 세상 속에다 천국의 씨앗을 뿌린 자들은 모든 기독교인들이다. 그렇지만 그 열매를 수확하시는 분은 하나님 아들이시다.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4:36).

 

세상 농사는 씨앗을 뿌린 자가 마지막 수확까지 거두게 되지만 하늘나라는 뿌리는 자가 따로 있고, 거두는 자가 따로 있는 것이다. 이는 모든 인간이 죄 아래 살고 있어서 온전치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세운 종들을 통해서 천국의 씨를 뿌리게 하였지만, 그 열매를 거두는 일만큼은, 하나님 아들을 통해서 하시겠다는 것이다. “첫 언약이 무흠하였다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리라!”(히8:7).

 

바울도 고린도전서 13장 10절에서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들이 모두 폐하게 되리라” 말하고 있다. 여기서 ‘온전한 것이란’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영을 마음속에 받은 자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란’ 그동안 기독교인들에게 주신 성령의 은사들을 말한다. 믿는 자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신 것은, 불신자들을 전도 하여 하나님 백성 만들도록 하기 위해서다. 하나님 백성은 아직도 성령의 법 아래 살고 죄인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아들의 손길을 통과한 후에야, 하나님 곡간에 알곡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 백성들이 구원 얻는 과정은 3단계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다. 모세를 따라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다를 건너는 것이 1단계 과정이다. 그리고 바란 광야를 지나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받는 것이 2단계 과정이다. 마지막은 여호수아를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3단계 과정이다. 성경에 기록해놓은 이런 과정은 앞으로 구원 받아야 할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 과정을 미리 보여주는 것으로 유대인뿐만 아니라,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구원까지도 미리 큰 그림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에도 3단계 구원과정은 계속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나오는 것(또는 할례)이 1단계 과정이며, 율법에 따라 안식일에 소와 양을 잡아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것이 2단계 과정이다. 마지막으로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를 믿는 것이 3단계 과정이다. 유대인들은 이 3단계 과정을 모두 거친 후에야 비로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는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3단계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기독교인들이 처음 이방 불신자로 살다가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을 때가 1단계 과정이다. 그 다음은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아서 ‘영적인 율법’ 아래서 신앙생활 할 때가 2단계 과정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하늘에 오르신 예수께서 ‘그리스도 영’이 되어 사람을 통해서 이방인들 앞에 다시 오실 때 그를 믿는 것이 3단계 과정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3단계 과정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아 도래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때가 되면 곧 영적인 주님이 곧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3단계 과정이 이루어질 것이다.

 

기독교인들의 3단계 구원 과정을 출애굽하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과 비교하여 다시 설명하자면, 기독교인의 1단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하여 홍해바다는 건너는 과정과 같고, 기독교인의 2단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란 광야를 지나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받아 그 아래 살던 때와 같고, 기독교인의 3단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를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과정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 앞에는 아직 여호수아와 같은 새로운 영적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시내산에 도착해서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받아 그 아래 살던 때와 같은 2단계 과정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 증거로 기독교인들 모두가 현재 영적인 율법 아래 살고 있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현재 구원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아직도 구원 받아야할 대상인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3단계 과정을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구약이 1단계, 신약이 2단계, 그리고 예수를 믿은 자신들의 현시점을 3단계라고 말할 수도 있다. 얼핏 들으면 그럴 듯한 말 같지만 전혀 앞뒤가 맞지 않다. 그렇게 해석할 것 같으면 이스라엘 백성들도 창세기부터 노아까지 1단계, 아브라함부터 말라기 선지자까지 2단계, 그리고 세례 요한이 회개를 외치던 때를 3단계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도 굳이 예수 믿을 필요 없이 모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방법을 통과하지 못한 자들은 절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은 인생들과 같지 않아서 만인 앞에 공평하신 분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3단계 과정을 거친 후에 구원 얻도록 하셨다면 기독교인들에게도 반드시 3단계 과정을 거친 후에야 구원 얻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평하심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는 3단계 과정을 거쳐서 구원 얻도록 하시고 기독교인들에게는 1, 2단계만 거쳐서 구원 얻도록 하신다면, 하나님은 불공평한 하나님이 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지옥 불에 떨어진 유대인들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억울하다고 항변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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