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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대한 오해​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제자들이나 사도 바울이 기록한 신약 성경을 보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다. 구약은 그 이전에 선지자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기록한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말씀 따라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니까 앞 세대 사람들이 기록한 성경 말씀을 뒤에 오는 세대 사람들이 보고서 신앙생활을 했던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여기서 우리가 신중하게 여길 것은 가령, 모세가 자신이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하여 성경을 기록했다 할지라도 후에 일어날 일들까지는 모세도 자세히 알 수 없으므로 기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만 성령의 감동으로 어림잡아 기록할 수는 있겠지만 정확한 사실까지는 기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선지자나 성경 기록자들이 그 당시의 현실 속에서 자신이 겪고 체험한 것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뒤에 오는 세대는 앞 세대가 기록한 성경을 마치 자기 현실로 오해하면서 자신의 상황으로 받아드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입증해주는 좋은 예가 바로 바울이 기록한 신약 성경을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액면 그대로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하여 기독교인들은 사도 바울과 같은 환경(율법 아래서의 생활)에서 신앙생활 하던 유대인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들을 바울과 같은 입장에다 놓고 성경을 보게 되니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의롭게 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을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바울은 히브리인으로 태어난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율법 아래서 신앙생활 하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예수님의 전적인 은혜로 그리스도인이 되어 직접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하여 성경을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바울이 기록한 성경을 보면서 자신을 율법 아래 살던 유대인으로 오해하고 그들의 구원 과정에 따라 의롭게 되고 또한 구원받은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이것은 대단한 착각이 아닐 수 없다. 현재 기독교인들은 율법도 없이 살아온 이방인에 불과하다. 따라서 율법 아래 살던 바울(모든 유대인들 포함)이 예수를 믿는 것과 율법도 없이 살아가던 이방인이 예수를 믿는 것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이것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같은 기독교인들끼리도 서로가 서로를 이단시하며 많은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 기독교인들에게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들 앞에도 온전한 분으로 영적인 주님이 오셔야 한다. 그리하여 영적인 주님을 기준점으로 하여 옳고 그름이 판가름 나게 될 것이다. 그러기 전에는 기독교인 어느 누구도 자기 교파가 정통이다 또는 자기 교회에 와야 구원 얻을 수 있다는 허황된 말들을 할 수가 없다. 그러한 모든 문제들을 한 순간에 해소하실 분은 오로지 영적인 주님 한 분 밖에 안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모세를 도구로 사용하셨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시켰다. 당시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면 모세는 참으로 위대한 인물이다. 그러나 모세는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에 불과하다. 모세가 분명히 위대한 인물이긴 하지만 종의 신분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지는 못한다.

 

이후에 태어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구세주로 떠받들고 있다. “우리 조상 모세가 우리를 애굽에서 구원해 주셨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모두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주신 것들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그런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쓰인 사람들을 흠모하여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오늘날 성령의 은사로 쓰임 받는 목사들도 모두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에 불과하며 모세처럼 종의 신분이라 기독교인들을 죄에서 구원하지 못한다.

 

심지어 예수가 율법의 완성자로 오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보다는 아브라함이나 모세 같은 자들의 이름만 들먹거릴 뿐 예수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다. 이를 두고 예수께서도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그러나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눅5:38-39)라고 말씀하셨다. 크고 화려한 것만을 좇는 인간의 습성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새 것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묵은 것에 안주하려는 인간의 어리석은 생각이다.

 

따라서 영적인 백성인 현재의 기독교인들이 사도들이나 바울이 기록한 신약 성경을 영적으로 올바르게 해석하여 자신들에게 적용하기 위해선 반드시 영적인 주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기 전에는 기독교인 어떤 누구도 성경을 영적으로 해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설사 자신의 지혜와 지식을 동원하여 성경을 풀어 해석한다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생각밖에 더 나올 것이 없다.

 

예를 들어, 바울이 기록한 갈라디아서 5장 16절에서 24절까지 말씀을 거의 모든 목사들이 성령을 따라 살라고 성도들에게 가르칠 것이다. 성령을 따라 살아야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마음이 부패한 기독교인들이 과연 성령을 제대로 따라 살 수 있겠는가? 기독교인들이 성령이 충만하여 한 순간은 성령을 따라 살지 몰라도 마음속에 들어 있는 악을 제거하지 않는 이상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 것을 좇아 살다보면, 결국 육신의 소욕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자신에게 져서 다시 육신의 소욕을 좇아 살게 된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의 정확한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바울이 기록한 성경 말씀으로 자신을 위로 내지는 확정지으려 한다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하는 말씀으로 자신을 스스로 구원 받은 하나님 자녀로 확정지으려 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그들이 불안했으면 이 말씀들을 자꾸만 떠올려서 스스로 자기 자신을 위안 받으려 했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다음과 같은 말씀들은 죽어도 안 보려고 하거나 그냥 슬쩍 넘어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자기 자신이 그런 일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 현재 두렵기 때문이다.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노,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라디아서 6:20-21)

 

그러면서 그들은 억지로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6:22-23)”고 열린 입으로 말은 잘하고 있지만, 마음이 부패한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이러한 성령의 열매가 들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속을 숨기고 겉으로 사랑과 희락과 자비와 온유를 드러낸답시고, 믿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얼마나 겸손한 척하는지 모른다. 그러다가 자신의 신분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는 이제까지 속으로 참았던 울분이라도 토해내듯이 불신자보다도 더한 행동들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현 주소이다. 누가 이것을 부인할 수 있으랴!

 

그런데 이런 사실을 모르고 기독교인들이 계속해서 자신들 마음속에도 그리스도가 계시다고 믿고 있다. 그러면서 믿음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야 된다고 말하고 있다.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아직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은데 어떻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수 있단 말인가?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그리스도 영으로 착각한 나머지 자꾸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야 한다고 말하지만 기독교인들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수가 없다. 기독교인들이 자꾸만 이런 억지 주장을 하기 때문에, 악한 영들은 이것을 교묘하게 속이고 거짓 목사들을 통해서 그들이 구원 받았다고 거짓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야 한다고 말했던 것은, 자신이 성령과 더불어 그리스도를 직접 체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의 12제자들이 예수로부터 죄 사함을 받은 후 마지막에 성령에 붙들려서 자기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하지만 바울은 열두 제자들과 달리 성령과 더불어 빛(영)으로 찾아오신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시고 이방인들 앞에 복음을 전했다. 바울이 다른 사도들과 달리 그렇게 쓰임 받았던 이유는 장차 이방인들 앞에 오실 영적인 하나님 아들을 예표해주기 위해서이다. 이로 미루어보아 이방인들 앞에 도적같이 오실 하나님 아들은 결국 바울 같은 자를 통해서 오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시 에베소 교인들이 이런 사실을 모르고 바울처럼 행동하고자 했지만 결코 바울 같은 삶을 살 수가 없었다.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가 자신의 마음속에 계셨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에베소 교인들은 이제 겨우 바울이 전해준 복음을 듣고, 성령을 받아 영적인 율법아래 놓인 초보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인데 그들이 바울 같은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이는 마치 어린 아이가 어른의 흉내를 내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로 오히려 부작용만 더 발생하게 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당시 에베소 교인들이 갖고 있던 생각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기독교인들도 불신자로 살 때 어느 누군가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 예수 이름을 부르게 되자,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었고, 그것이 후에 성령세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령을 받고 보니 당시 황홀한 기분은 자신이 마치 천국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때까지 하나님을 모르고 개, 돼지처럼 살던 사람이 성령을 받게 되자,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알게 되었고 또한 마귀와 귀신들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불신자로 살다가 이런 체험을 하고 나면 자신도 이제 하나님의 자녀요, 또한 확실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를 믿고 성령 받아서 이런 체험을 하게 되었는데 감히 어느 누가 나서서 기독교인의 구원을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제 기독교인들은 구원받았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자신이 성령을 거역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되면 악한 영들은 믿는 자들을 발 아래 묶어놓고, 장차 오실 아들을 믿을 수 없게끔 방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이 스스로 구원받았다고 착각했기 때문에 자신을 죄에서 구원해줄 예수를 배척하고 말았다. 이는 바리새인들을 지배하고 있던 악한 영들이 예수를 믿지 못하도록 방해했기 때문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성령을 따라 살지 못하는 것에서도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따라 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 마음속에 죄악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처음 받을 때와는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타락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겠지만 자신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있는가를 한 번쯤 확인해본 사람이라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그러나 믿는 자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계시면 누구나 성령을 따라 살 수 있다. 그 이유는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 오셨기 때문에 믿는 자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아들)가 오시게 되면 그동안 인간의 마음속을 지배하고 있던 죄악(죽은 영)이 떠나고, 대신 그 자리를 그리스도가 차지하여 아버지(성령)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우리를 성령 앞으로 인도해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런 설명을 해줘도 그리스도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자들로서는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성령이 곧 그리스도 영이라고 주장을 한다.

 

우리가 불신자들에게 바람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갈대가 흔들리는 것을 보며 바람이 존재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 눈에는 보이지 많지만 바람처럼 존재하시는 분이라고 설명을 한다. 그래도 불신자는 그런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때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하는 자는 답답하여 죽을 지경이지만, 그래도 믿는 자는 끝까지 하나님에 대하여 설명을 한다. 그래도 불신자는 곧이듣지 않는다. 결국 성경에 “받은 자 외에는 알 수 없다”(고전2:11)고 하는 말을 떠올리며 되돌아서고 만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 거듭난 자가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아직도 육신의 소욕을 벗지 못한 자들이라 자신의 생각(죽은 영)이 자신을 온통 지배하고 있어서 도무지 하나님 아들이 전해주는 말을 곧이듣지 않는다. 이는 마치 불신자에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설명할 때 불신자가 터무니없는 말로 알아듣는 것처럼 기독교인들 역시 똑같은 행동을 취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스라엘 땅에 오셨을 때 바리새인들에게 하늘나라의 대해서 설명하셨지만, 그들이 예수 말을 비꼬며 듣지 않던 것과 너무도 똑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들 앞에 하나님 아들이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전해주는 말을 듣고 자신이 성령을 거역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자들은 모두가 아들 앞으로 달려 나와서 자신의 죄를 통해 자복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 은혜를 입은 자들은 다시 전 세계 방방곡곡을 누비며 천국복음을 전해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나오는 자들을 모두 알곡으로 인치는 작업을 하게 될 것이다. 그때 알곡들은 하나님 곡간에 들어갈 것이나 하나님의 아들이 전해주는 말씀을 믿지 않아 끝까지 자기 죄악을 벗지 못한 자들은 쭉정이로 땅에서 버림을 받게 될 것이다.

 

즉, 기독교인 중에서도 영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고 ‘양자의 영(롬8:15)’을 받게 되면, 비로소 영적인 소경에서 벗어나서 자기 동족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아직까지 기독교인들 중에서는 그런 자가 없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의 잘못된 신앙생활을 바로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 중에서도 ‘성령의 은사’로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자는 있지만, 기독교인들의 죄 문제를 해결할 자는 아직 없다. 그러나 영적으로 오신 아들을 믿고 ‘양자의 영’을 받아 거듭난 자는 바울처럼 자기 동족들의 잘못된 신앙생활을 지적할 뿐 아니라, 기독교인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바울이 자기 동족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것은 너무나 그들이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입술로는 하나님 이름을 부르고 있었으나 정작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여 자기의 기득권과 자기 명예를 드높이려 했기 때문에 바울은 그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일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만 일어났던 것이 아니고 오늘날 성령의 법 아래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도 똑같이 그러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 역시 입술로는 하나님 이름을 부르나 실상은 마음은 악독이 가득하다. 기독교인들 역시 살았다고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그들이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기독교인들을 배나 ‘지옥자식’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지옥자식’ 만들고 있다는 말은, 그들 말속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다는 것이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로마서 3:13-18)

 

이제 얼마 되지 않아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 앞에 오실 것이다. 그때는 거짓목사는 말할 것도 없고, 입술로만 하나님 이름을 부르던 자들과 그동안 교인들을 능욕하고 욕보인 자들과 또한 양의 목에 빨대를 꼽고 피를 빨던 자들은 모두 그 자리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적그리스도 영으로 교인들을 미혹하여 이단에 빠지게 했던 자들 또한 미리 거둬들여서 불지옥에 처넣게 될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해도 가지 말라 그리스도는 너희 마음속에 있느니라(마24:23)!”는 말씀으로 진짜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단단히 무장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 듣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다음 말씀을 마음에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무덤은 산에 있는 묘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이 죄악으로 인해 모두 죽어 있음을 뜻하는 말이다. 영이 죽은 자라도 주의 음성을 듣고 나오는 자는 살아나게 될 것이란 말씀이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한복음 5:2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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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양평군 용문읍 삼성리 584-1 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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