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비유(2)
성경에 보면 천국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부터 시작하여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이야기까지 천국에 관한 설명이 아주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에 비해서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천국관은 예수만 믿으면 누구나 천국 갈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 내내 불신자로 살던 사람이 죽는 순간이라도 예수를 영접하면 모두가 천국에 갔을 것으로 믿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평생 불신자로 살다가 죽을 때 예수를 영접만 시키면 모두들 천국에 갈 수 있을까?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왜 이렇게 천국에 관한 비유를 많이 설명하고 있을까? 만약, 우리 생각처럼 누구나 예수만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면 굳이 성경에서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아닌가? 우리의 생각이 맞는다면 성경은 분명히 모순을 낳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성경이 틀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뭔가 천국에 관하여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럼 우리가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과정 하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것을 하나하나 짚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천국에 관하여 우리가 꼭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은, 천국은 신앙생활을 오래했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곳도 아니며 또한 교회에서 높은 지위나 감투를 쓰고 있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천국은 오로지 하나님 아들을 믿어야만 갈 수 있는 곳이다. 따라서 율법 아래 살던 유대인들에게는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이고, 성령 아래 살던 기독교인들에게는 영적으로 오시는 하나님 아들을 믿어야 구원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를 믿어야 구원이라고 했던 것은 바로 유대인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며 따라서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를 믿어야 구원이 아니고, 바로 이방인들 앞에 오시는 하나님 아들을 믿어야 온전한 구원에 이를 수 있게 된다. 따라서 기독교인들 앞에는 아직 주님이 오시지 아니했기 때문에 현재 생존하는 기독교인들 중에서는 온전한 구원에 이른 자가 한 명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죽은 자들 모두 지옥 갔다는 말은 아니다.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성령 뜻을 따라 산 자들은 하나님께서 구원에 이르게 하셨을 것이고, 성령의 뜻을 거역한 자들은 모두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될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바로 믿는 백성들 모두가 하나님 아들을 믿고 온전한 구원에 이르도록 하시기 위해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천국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의 20장에 나오는 포도원 비유도 바로 그중에 하나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다고 예수가 말씀하셨다. 일이 끝나고 오전 9시에 온 사람, 12시에, 오후 3시에, 오후 5시에 일하러 온 사람들이 제 각기 주인과 품삯을 계산하는데, 아침에 일찍 온 사람이나 나중 늦게 온 사람이나 모두 똑같이 약속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아가더라는 것이다. 그러자 아침에 일찍 온 사람이 주인에게 왜 나중에 온 사람과 똑같은 품삯을 지불하느냐고 항의하자, 주인은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데 왜 네가 항의 하느냐며 내가 선하므로 나를 악하게 보느냐”며 그자를 힐문한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늦게 왔든 일찍 왔든 내가 주고 싶어서 주는 것인데 왜 네가 참견 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런 부분이 인간 쪽에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당연히 일찍 온 사람에게는 조금이라도 더 주는 것이 상례인데 왜 맨 나중 온 사람과 똑같이 대우를 하냐는 것이다. 바로 이런 생각 때문에 인간은 천국도 자신의 생각에다 맞춰놓고 갈 수 있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이 비유가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했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아들을 믿어야 천국 갈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아들을 믿는 것에 있어서는 오전 9시부터 믿었던 자나 오후 5시에 믿었던 자나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이것을 두고 따지고 있는 것이다. 왜 나는 처음부터 주님을 믿었는데 나중에 믿은 자들과 똑같은 대우를 하냐고 말이다. 그럴 때, 주님은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데 왜 네가 나서서 따지고 있냐”는 것이다.
씨 뿌리는 비유는 말할 것도 없고(마13:1-30), 슬기로운 다섯 처녀 이야기(마25:1-13)도 같은 맥락이다. 미련한 처녀들은 기름을 넉넉하게 준비하지 못해서 새벽녘이 되어서는 기름이 다 떨어져서 졸다가 신랑을 맞이할 수 없게 되지만,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은 넉넉하게 준비한 기름으로 인해서 늘 깨어있기 때문에 언제 신랑이 오더라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악하고 게으른 자들은 달랑 오늘 하루만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기 때문에 아슬아슬한 삶을 살지만 자신의 처지(죄악)를 깊이 깨닫고 있는 자들은 항상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언제라도 주님의 음성이 들려지게 되면 즉각 주님을 맞이하러 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천국에 관한 비유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믿는 백성들이 법 아래서 살다가 구세주로 오시는 하나님 아들을 믿기가 그만큼 어렵기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 아들을 믿을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예수를 그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 아들로 믿는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것을 비유로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기록한 책이 바로 신약성경이다.
돌아온 탕자 비유 말씀의 내용을 살펴보면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첫째 아들은 그런대로 아버지 말을 잘 듣고 순종하는데 비해서 둘째 아들은 아버지 말도 잘 듣지 않았다. 또한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시키는 일이라면 사사건건 아버지에게 따지고 대들더니 급기야는 아버지에게 자신에게 돌아올 분깃을 챙겨달라고 하더니 홀연히 아버지 곁을 떠나고 말더라는 것이다.
아버지의 잔소리를 듣기 싫어 집을 떠난 그는 우선 당장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있으니까 어디가면 자기 목구멍에 풀칠하나 못할까 싶어 별 걱정이 없었고 별 당장에 아쉬움도 없었다. 그렇다보니 가지고 있는 돈을 흥청망청 쓰기에 바빴던 것이다. 돈이란 벌기는 어려워도 쓰기는 쉽다. 마찬가지로 둘째 아들의 그 많던 재산도 허랑방탕한 그의 생활로 인해서 순식간에 바닥이 나고만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큰 흉년까지 들어 민심까지 흉흉했던 것이다. 민심이 흉흉하다보니 없는 사람들은 더욱 더 궁핍할 수밖에 없다. 그제야 자신을 궁핍함을 깨닫고 여기저기 구걸을 해보려 하지만 때가 때인지라 자신 하나 받아줄 곳이 없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돼지 키우는 집에 들어가 겨우 목구멍에 풀칠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집 형편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라서 그의 곯은 배를 채우기 위해서는 할 수 없이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라도 마음껏 먹고 싶지만 성경은 그것마저도 여의치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어려운 환경이 그를 그렇게 만들어 간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속으로 깊은 탄식을 자아내는 것이다. “내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결국 나는 여기서 이렇게 주려 죽는구나(눅15:17)!”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가 무슨 마음을 먹었든지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에잇! 차라리 내가 여기서 이렇게 굶어죽을 바에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눅15:18-19)!”라고 마음먹고는 그길로 아버지께 달려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비유 내용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느끼고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탕자의 비유는 예수께서 당시 유대인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그 당시 실생활 속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예화로 들어가면서 설명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런 예는 오늘날 우리들의 현실 속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이 세상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 잘되지 않기를 바라는 부모가 있겠는가? 자식을 가진 모든 부모들의 바람은 자기 자식이 잘되는 일일 것이다. 이렇게 모든 부모들은 자기 자식이 잘되라는 뜻에서 자식이 옳지 못한 길로 나갈 때 그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고를 하기도 하고, 꾸지람을 하기도 하며, 때로는 야단을 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식들 입장에서는 부모의 그런 충고가 오히려 자신들을 관섭하는 것이라 여기며 도리어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 간에 그런 충돌이 잦다보면 급기야 탕자처럼 자식이 훌쩍 부모 곁을 떠나고 마는 것이다.
자식들의 이런 행위는 부모의 관섭을 받기 싫다는 의도도 들어있지만, 그 보다는 그렇게 집을 떠남으로 말미암아 부모가 나로 인해서 고통 좀 당해보라는 아주 고약한 생각이 그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집을 떠나면 부모만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은 자기 자신이 훨씬 더 크나 큰 곤경에 처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본문에 나오는 탕자의 말로를 보면 그것을 쉽게 집작할 수 있으리라!
자식을 떠나보낸 부모 마음 역시 편치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부모를 거역하고 집을 뛰쳐나간 자식이지만 자기가 낳은 자식이 집을 나가 있는데 어느 부모가 마음 편히 잠을 청할 수가 있겠는가? 자나 깨나, 이 녀석이 어디서 제때에 밥은 잘 먹고 있는지, 어디서 잠은 잘 자고 있는지, 누구와 싸우고 다니지는 않는지 마음 편할 날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이제나 돌아올까 저제나 돌아올까 노심초사 눈만 뜨면 동구 밖을 하루에도 몇 번씩 처다 보는 것은 집 나간 자식이 부모 품으로 하루속히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진리도 없는 인간들도 하물며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야 집나간 당신의 자식들을 얼마나 기다리고 계실까? 하나님 앞에는 모든 인간들이 탕자나 다름없다. 그런 탕자들이 집을 나가 있으면서 여러 가지 환란과 고통을 통해서라도 자기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아버지 품으로 속히 돌아와 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고생의 떡을 먹으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처지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이 주는 쥐엄 열매와 썩어빠진 음료가 좋다고 그걸 먹고 마시면서도 집에 돌아올 생각을 못하고 있는 자식들을 볼 때마다 아버지는 가슴이 매어지는 것이다.
탕자는 그래도 자신의 처지를 재빨리 깨닫고 신속하게 아버지 품으로 돌아오는 것을 볼 수 있다. 모든 탕자가 집을 나올 때는 다시는 부모를 뵙지 않을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집을 떠나온다. 마치 세상이 자기를 반겨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돈이 주머니에 두둑하게 들어있을 때뿐이지 돈 떨어지고 나면 뒷간에 나뒹구는 쓰레기로 취급하고 만다. 집을 나간 자들이 그런 사실을 알리 만무하다. 그래서 얼마동안은 가지고 있는 돈이 있어서 흥청거리지만 돈이 바닥나고 나면 금세 초라해지고 만다.
인간이 가진 것이 없을 때 가장 비굴해진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자존심을 끝까지 내세우며 계속 세상에서 버티고 살 것인가? 성경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돌아온 탕자는 받아주되, 끝까지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고 집으로 돌아오기를 거부하는 자에 대하여는 그가 비록 하나님의 자녀가 될 신분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결코 받아주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성경은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돌아온 탕자에 대하여 아버지께서는 그의 지난 잘못을 묻지 않고 더욱더 따뜻하게 맞아 주셨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동안 집을 떠나 있던 탕자가 객지에서 어떠한 고통 속에서 살다왔는가를 아버지보다도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자식이 또 다시 아버지 말을 거역하며 집을 떠나겠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때로는 이런 크나큰 아픔이 더 큰 성숙함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꼭 명심해야 할 것은 모든 사람이 다 그렇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아버지 집을 떠나서 못 돌아오는 탕자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할 수만 있거든 아버지 밑에서 순종하며 복종하고 따르는 삶이 훨씬 복된 삶임을 알아야 한다. 현재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혹시 집을 떠난 탕자의 삶을 살고 있다면 지금 즉시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하는 진실한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