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예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며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지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마7:13-14)”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유대인들은 하나님 앞에 죽도록 제사를 드린 사람들이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열심히 예배를 드린 사람들이니까 죽으면 모두가 천국에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생명으로 가는 길을 찾는 자가 적다고 하셨을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 아래서 약 2천년 동안을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러다보니 이런 생활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있다. 그들은 성전에 나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기만 하면 모두가 거룩하게 되어 자동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줄 믿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마다 그들은 점점 더 거룩한 백성이 되어 갔다. 율법 아래서는 하나님 앞에 열심을 낼수록 점점 더 자신의 의(義)만 쌓게 된다. 그러므로 결국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마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이는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율법 아래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도 나름대로 힘든 점은 있었다. 이방인들처럼 마음대로 행동하며 살 수가 없었고 율법의 제약 때문에 아무거나 먹을 수도 없었다. 더 나아가 안식일을 지키는 일과 또한 여러 가지 율법이 금하고 있는 것들이 많아서 이방인들에 비해서 훨씬 더 힘든 생활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 고통을 감수하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면, 이런 고통쯤은 백 번 천 번 겪고서라도 천국에 들어가고 싶어할 것이다.
이것이 과연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의미일까?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으로 인한 고통을 감수하면서 살아온 백성들인데 굳이 예수께서는 왜 또 다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을까?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 아래서 살아온 삶은 결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보내주신 아들을 믿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이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자신들은 지금까지 성전에 나가 소와 양을 잡아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그로 인해서 자신들의 죄가 도말되어 모두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는데, 누구를 또 믿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인가 하고 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스라엘 백성들 생각이고 하나님의 뜻은 아들을 믿어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범죄를 사함 받고 영생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율법으로는 어느 누구도 천국에 이를 수 없으므로 율법 아래 살던 자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보낸 아들을 믿어야 하는데, 아들을 믿는 일은 개개인이 자발적으로 믿어야 하기 때문에 결코 쉽지 않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싫든 좋든 간에 누구든지 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낸 아들을 믿는 일은 본인이 싫으면 믿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 결과는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보낸 아들을 믿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말을 쉽게 받아드릴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자신들은 율법에 따라 열심히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려왔고, 그로 인해 자신들의 죄가 도말되어 모두가 천국에 들어갈 줄 알았는데, 이제 와서 또 다시 예수를 믿으라니 그것도 전혀 볼품없게 생긴 목수의 아들을 하나님 아들로 믿으라니, 어느 누가 그런 사실을 믿으려 하겠는가? 그러나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말씀 하시는 좁은 문의 의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좁은 문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오늘날 기독교인들 역시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예배당에 나가서 하나님 앞에 예수 이름으로 예배를 드리기만 하면, 그것으로 자신들의 모든 죄가 도말되어 천국에 이를 것으로 믿고 있다. 유대인들이 걸어갔던 길을 기독교인들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데서 오는 무식의 소치이다.
무엇보다도 마음이 부패한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날마다 마음속에 올라오는 온갖 더러운 죄악들을 물리치고 성령의 법을 온전히 따라 살 수 있겠는가? 기독교인 중에서 어느 누구도 성령의 법을 따라 살 자는 없다. 만약 성령을 받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법을 어겼을 경우 하나님의 저주로 말미암아 인간의 마음속에 병이 들게 되고, 그때부터 죄가 깨달아지지 않는 것이다.
죄가 깨달아지지 않게 되면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게 되고,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게 되면 그는 죄를 깨닫지 못하게 되어 하나님이 보내주신 아들 또한 믿을 수 없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영적인 문둥병에 걸린 자이다. 기독교인들 중에는 성령을 거역하여 영적인 소경, 영적인 절름발이, 영적인 귀머거리, 영적인 혈루증을 앓고 있는 자들이 부지기수로 많이 있다. 이들은 모두 영적인 아들이 오셔서 해결해 주셔야 한다.
하나님 백성으로 부른 받은 기독교인들 역시 성령의 법을 따라 살자니 온갖 고통이 따른다. 불신자들은 마음 놓고 놀러 다니며 먹고 마시는 데 비해서 기독교인들은 주일날 하루 종일 교회에서 지내야 하고 또한 함부로 놀러 다닐 수도 없고, 또한 아무거나 마음 놓고 먹고 마실 수도 없다. 거기가 날마다 새벽예배에 나가야하고, 수요예배와 금요철야 또한 기독교인들의 발목을 잡는다. 아무튼 불신자들의 자유로운 생활에 비하면 나름대로 크나큰 고통이 따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정도 불편과 고통이라면 얼마든지 감수하고서라도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과연 이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의미일까?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은 성령의 법 아래서 여러 가지 제약을 받으면서 살아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왜 또 다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 그것은 지금까지 기독교인들 역시 성령의 법 아래서 살아온 삶으로는 결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인가? 그것은 기독교인들 역시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아들을 믿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이다. 기독교인들로서는 이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자신들은 지금까지 예배당에 나가서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죄가 도말되어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누구를 또 믿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단 말인가 하고 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독교인들 생각이고 하나님의 뜻은 아들을 믿어야 기독교인들 역시 성령을 거역한 자범죄를 사함 받고 영생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보낸 아들을 믿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말에 모두들 시큰둥하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자신들은 예수 믿고 성령을 받아 성령의 법에 따라 열심히 하나님 앞에서 예수 이름으로 예배를 드리고 그것으로 모두가 천국에 들어갈 줄 알았는데, 이제 와서 또 다시 하나님이 보낸 아들을 믿으라니, 그것도 전혀 볼품없게 생긴 자를 하나님 아들로 믿으라니 얼마나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리겠는가? 그러나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들에게 말씀하시는 ‘좁은 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성령의 법 아래 살던 기독교인들이 예배당에 나가서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법에 따라 하나의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서 싫든 좋든 간에 누구든지 그 의무를 다해야 한다. 만약 그 의무를 다하지 않게 되면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 되어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게 되어 기독교인들은 마음속이 병들게 된다. 마음속이 병든 자들은 악한 영에게 쓰임 받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괴로움을 당하게 된다.
이렇게 성령의 법으로는 어느 누구도 천국에 이를 수 없다. 따라서 성령의 법 아래 살던 자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이 보낸 아들을 믿어야 하는데 아들을 믿는 일은 강요가 아니고 의무도 아니기 때문에 본인이 믿기 싫으면 믿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그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본인이 져야 한다.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고 말씀하신다. 이를 직역하면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께서 주신 법을 지키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그것으로는 어느 누구도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나를 믿고 천국에 들어가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오늘날 성령의 법 아래 살고 기독교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러나 천국에 들어가기 싫은 자들은 하나님이 보낸 아들을 믿지 않아도 된다. 아들을 믿는 일은 누가 강요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고 또한 아들을 의무적으로 믿어야 되는 일도 아니다. 따라서 본인이 싫으면 믿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그 결과는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예수께서도 이를 두고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지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천국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신다(마19:24,눅18:25). 그 이유는 자신을 버리고 아들을 믿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말이다. 만약 기독교인들이 성령의 법을 지켜서 천국에 들어갈 것 같았으면 예수께서 굳이 이런 표현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한다. 부와 명예와 권력을 가진 자들은 그것을 버려야 하고 세상에서 배운 학문과 지식도 다 버려야 한다. 그런 것들을 버리지 않고 아들을 믿게 되면 그것이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낸 아들을 믿기 위해서는 인간의 자존심도 버려야 하고 자신의 목숨까지도 포기해야 한다. 이런 것들을 버리지 못하면 결국 육신의 생각이 올라와서 아들을 믿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라고 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부모나 형제나 자매나 자식도 버리고 그리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마태복음 19:29)
성령의 법 아래서는 이런 것들을 버리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 있다. 기독교인들이 예배당 가서 예배드리는 일이야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낸 아들을 믿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지 않고서는 절대 믿을 수가 없다. 그래서 천국 가는 길이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좁은 문의 의미를 바로 이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유대인들이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린 것으로 천국 갈 수 있다고 한다면 좁은 문이 왜 필요하겠으며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교회 가서 예배드리는 일로 천국 갈 수 있다고 한다면 왜 좁은 문이 필요하겠는가?
예수께서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다”고 하는 말씀은 성령의 법에 따라 교회를 왔다 갔다 하는 것으로 천국에 들어가고자 하는 자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하시는 말씀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보낸 아들을 믿는 자들이 너무도 적기 때문에 안타까워서 하시는 말씀이다.
아들은 오직 죄인만 구원하러 오시기 때문에 인간이 죄인이란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면 그는 절대로 아들을 믿을 수 없게 된다. 아들을 믿지 않게 되면 자신의 죄 문제는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다. 율법의 제사로는 절대로 인간의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인간이 죄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하고 죽게 되면 그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야 한다.
유대인들 중에서는 세리와 창기들이 자신의 죄를 들고 예수 앞에 나아갔듯이 오늘날 자신이 성령의 법을 거역한 죄인이란 사실을 깨닫는 자들은 아들 앞으로 달려 나갈 것이고,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을 의롭다고 하는 자들은 예수를 배척하듯이 오늘날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하는 자들 또한 아들을 배척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에 대해서는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
이방인으로 살던 사람이 성령을 받아 법 아래 살다가 성령을 거역하고 죄인이 되어, 이방인들 앞에 인격적으로 오신 아들 앞에서 자신을 죄를 고백하고, 양자의 영(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그리스도로 다시 태어난 사람을 하나님의 영적인 자녀(아들)라 부른다. 따라서 아직 기독교인(영적인 백성)들 앞에는 하나님의 영적인 아들이 오시지 않았으므로 기독교인들은 아직 온전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이다. 기독교인들로서는 이런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이는 하나님께서 세운 법칙이므로 어느 누구도 항변할 수 없다.
영적으로 오시는 아들을 믿어야 구원이라고 하면 기독교인들은 이런 의문이 들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영적인 아들이 오시기 전에 신앙생활하다 죽은 사람들은 다 어떻게 되느냐? 이에 대한 답변으로, 그럼 유대인들도 예수를 믿어야 구원인데, 예수가 오시기 전에 신앙생활하다 죽은 구약시대 사람들은 다 어떻게 되었는가를 생각해 보면 된다. 구약 때나 오늘날이나 아들이 오기 전에 신앙생활하다 죽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자들은 모두 구원해 주셨다. 단, 사람들 보기에 합당한 자가 아니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자들이라야 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늘나라에 있다(마8:11)”고 말씀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 목적을 위해서 쓰임 받은 자들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 역시 하나님 목적을 위해서 쓰임 받은 자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종으로 구원해 주셨다. 그러나 종들은 열 번 잘하다가 단 한 번만 잘못해도 버려지기 때문에 종들로 구원 받은 자들이 그리 많지 않다. 오늘날 성령 충만한 자들이라도 끝에 가서 모두 타락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게 되자 하나님께서 그들 마음에 유혹을 역사하여 구원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인간이 보고 판단하는 삶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보고 판단하는 삶이어야 한다. 구약에서는 아벨이나 욥, 그리고 엘리야를 극진히 대접했던 사렙다 과부 같은 자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산 자들이다. 신약에서는 삭개오와 나인성 과부와 누가복음 2장에 등장하는 시므온과 같은 자들이다. 그리고 이방인 중에서는 로마 백부장과 수로보니게 여인과 수가성 우물가 여인과 고넬료 같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산 자들이다.
이제 이방인(기독교인)들 앞에도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게 되면 그때는 하나님께서 모든 구원 문제를 아들에게 전적으로 일임하신다. 기독교인들이 지금까지는 성령의 법아래서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겠지만, 그것은 온전한 것이 아니고 장차 오실 영적인 그리스도의 모형에 불과했던 삶이기에 이제는 기독교인들도 법 아래서의 신앙생활을 종지부 찍어야 한다.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그리스도 모형으로 2000년 동안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던 것을 예수께서 오시므로 말미암아 제사를 폐했듯이 기독교인들 앞에도 하나님 아들이 오시게 되면,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이 예배당에서 예배드리던 일들도 그치게 된다.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마태복음 11:12-13)
아들이 오시고 난 뒤에는 ‘천국은 침노하고 빼앗는 자의 것이 될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는 어느 누가 자신의 죄를 들고 아들 앞으로 달려 올 것인가를 빗대어서 하시는 말씀이다. 법 아래서 하는 신앙생활은 하나님 백성으로서 의무를 다하는 것일 뿐 결코 그런 삶으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가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인격적으로 보내 주시는 아들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양자의 영을 받아 다시 태어나야 비로소 하나님의 영적인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