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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성전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께서 유대인들을 향하여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말씀하신다. 그때 유대인들이 들고 일어나서 “우리 조상들이 46년 동안에 걸쳐 지은 이 성전을 어떻게 네가 사흘 동안에 일으켜 세운다는 말이냐”며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길길이 날뛴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몸을 가리켜 한 말이나, 유대인들이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오해하여 예수를 죽이려고 벌떼처럼 달려드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주신 건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그야말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요, 또한 자신들의 삶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곳이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이 없어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웬 보잘 것 없는 자가 나타나서 성전을 허물고 사흘 동안에 짓겠다는 것이다. 이는 유대인의 자존심을 짓밟는 행위요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충분히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분통을 터뜨릴 만하다.
하지만 예수가 부활하신 이후 정말로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 성전은 로마군들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고, 진짜 그리스도의 거룩한 성전이 예수를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속에 세워지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믿는 자들이 바라던 진짜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다. 예수께서도 이를 두고 사람 손으로 지은 건물을 허물고 성전된 자기 몸을 믿으라고 말했던 것이다
만약 오늘날에도 예수께서 기독교인들 앞에 도적 같이 오셔서, 지금까지 예배당에서 드리던 모든 예배를 폐하고 “나를 믿으라고 말한다”면 과연 기독교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모두가 눈에 쌍심지를 키고 도적 같이 사람을 통해서 오신 예수를 이단으로 치부하며 당장에 그를 잡아 죽여 없애려 할 것이다. 지금까지 그 어떤 이단이라도 예배를 폐하면서까지 자신을 믿으라고 말한 자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어둠 속에 살고 있는 인간과 하나님 아들이 다른 점이다.
어둠 속에 살고 있는 인간들로서는 그들이 아무리 하나님 백성이라 하더라도 결코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아들 한 분뿐이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스도로 거듭나야 한다. 그런데 당시 예수를 배척하던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 역시 지금까지 성령의 법 아래서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왔지만, 이방인들 앞에 영적으로 오신 아들을 믿고 그리스도로 거듭나기 전에는 절대로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율법의 규례를 따라 살도록 하신 것은 모두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주신 것들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어느 누구도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들로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모르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 오신 아들에 대하여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면 절대 그런 행동을 취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백성이라도 어둠 속에 살고 있다는 증거다.
오늘날 예수 이름을 부르는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주시고 성령의 법에 따라서 예수 이름으로 예배를 드리도록 하신 것은, 장차 이방인들 앞에 도적 같이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주신 것들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로서는 어느 누구도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들로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모르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 오신 아들에 대하여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있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았다면 아들에게 절대 그런 행동을 취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들이라도 어둠 속에 살고 있다는 증거다.
만약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계시다면 그들은 예배당에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행위를 진작 그쳤어야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예배당에 모여서 예수 이름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은 아직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다는 증거다. 그 이유는 유대인이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성전(예배당)에 모여 하나님 앞에 제사(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것은 아직 자신들 마음속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성전이 건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성전이나, 오늘날 예배당이나 모두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주신 것들이다.
그리스도가 인간의 마음속에 주인으로 들어오시게 되면 이런 것들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된다. 율법 아래 살던 유대인들에게는 육체를 입고 오신 아들을 믿어야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성전이 세워질 수 있고, 영적인 율법아래 살고 있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영적으로 오시는 하나님 아들을 믿어야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성전이 세워지게 된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아 기독교인들 앞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적인 아들을 보내주신 적이 없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아직도 성령의 법 아래 살고 있는 백성들일 뿐 아직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믿는 자가 거듭났다고 말해놓고도 계속해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것은 아직도 무언가 부족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 부족한 것이 바로 기독교인들의 허전한 마음을 채워줄 그리스도의 거룩한 성전이다. 그리스도가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오시면 더 이상 누구의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다.
성전 구조는 인간의 영혼 구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인간의 영은 하나님의 지성소와 같은 장소이다. 지성소에는 법궤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만나를 담은 항아리가 있다. 법궤는 하나님께서 법을 주관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나타낸다. 그리고 만나를 담은 항아리는 인간의 생명이 하나님 손에 달려 있음을 말해주고 있으며, 또한 인간이 먹고 살아야 할 일용할 양식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은 예수가 계셔야할 성소와 같은 장소이다. 성소에 보면 떡상과 금촛대와 향단이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떡상은 예수 몸을 상장하고, 금촛대는 참 빛을 상징하며, 향단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기도를 뜻한다. 떡상으로 비유되는 예수 살은 우리가 날마다 먹어야할 말씀이다. 인간의 영혼이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먹어야 한다. 세상이 주는 것으로는 인간의 영혼이 살 수 없다. 이 세상에서 육신이 행복한 자는 자기 영혼이 죽어가고 있다는 증거다. 반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는 자는 날마다 자기 육신을 처서 복종시켜야 하기 때문에 육신으로서는 짜증나고 고통스럽다.
성소 안에 있는 금촛대는 우리의 마음을 밝혀줄 그리스도의 빛이다. 그리스도가 없는 자는 마치 암흑 속에서 사는 것과 같다. 이런 자는 죄를 지어도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죄를 짓고도 회개치 못하여 망하는 것이다.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눅11:34,35)!” 마지막으로 향단은 예수께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기도를 말한다.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신 자는 예수께서 자신을 대신하여 중보 기도를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없는 자는 자기 자신이 기도를 올려야 하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이 올리는 기도 외에는 절대 받지 않으신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은 장차 이방인들 앞에 영적으로 오실 하나님 아들을 기다리며 드리는 예배이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아 아들을 세상에 들어 내놓지 않고 계시지만, 이제 때가 되면 곧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드러나게 하실 것이다. 그 때는 기독교인들 모두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하나님이 보낸 아들을 믿고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야 자기 마음속에도 그리스도의 거룩한 성전에 세워지게 될 것이다. 자기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성전이 세워지게 되면 그 어떤 비바람과 태풍에도 굳건하게 잘 견딜 것이다. 그러나 자기 마음속에 성전에 없는 자는 조금만 바람이 세게 불어도 금방 넘어지고 말게 될 것이다.
하나님 아들이 오시고 나면 그동안 기독교인들에게 주셨던 예배를 포함한 모든 은사들이 다 폐하여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해야 기독교인들이 아들 앞으로 달려 나와서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들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구원 사역을 펼치기 시작하면 그때는 이미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것(권세)을 일임했다는 뜻이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들이 모두 폐하리라” (고린도전서 13:8-10)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아들로 새롭게 만들어지는 과정은 잃었던 첫사랑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전적으로 새롭게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세상적인 개념으로는 잃었던 것을 다시 회복하는 줄 알고 죽어도 옛것을 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가 옛것을 놓아버려야 아들로 말미암아 새롭게 다시 빚어질 텐데 죽어도 나의 옛것은 놓지 않으려고 하면서 새롭게 빚어지기만을 고대하고 있으니 새롭게 만들어질리 만무하다.
앞으로 하나님이 보낸 아들을 믿지 않아 자기 마음속에 성전이 세워지지 않는 자들은 끝까지 사람 손으로 지은 건물에 나아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게 될 것이다. 예수를 믿지 않던 바리새인들을 보라! 지금도 그들은 무너져 내린 예루살렘 성전 벽에 대고 통곡을 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는 믿지 않지만 하나님은 믿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들을 통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아버지 앞에 올 자가 없다고 했다. 그들은 예수는 부인하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믿겠다는 것이다.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이다.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지금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성령을 받고 모두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제아무리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러도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계시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결코 당신의 자녀로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없는 자는 결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이 이렇게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 중에도 유대인과 같은 자들이 많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스라엘 땅에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는 하나님 아들로 인정하겠지만 사람을 통해서 이방인들 앞에 도적 같이 오신다는 예수는 절대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늘에 오르신 예수가 사람을 통해서 다시 오실 수 있느냐는 것이다.
사도 바울 마음속에 예수가 영으로 들어가서 천국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지만, 마음이 강퍅한 자들은, 사람을 통해서 오신 그를 하나님 아들로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진짜 하나님이 보낸 아들은 배척한 채, 사람 손으로 지은 건물에 나아가 하나님 앞에 끝까지 예배를 드리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을 구원해 줄 메시아를 세상 끝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이다. 사도 바울은 이런 자들은 두고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 말한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갈라디아서 3:10)
유대인만 어리석은 자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기독교인 중에서도 얼마든지 어리석은 자들이 나올 수 있다. 자신이 성령으로 구원받았다고 우쭐되는 자들일수록 또는 교회에서 높은 감투를 쓰고 있거나, 혹은 중요한 직책을 맡은 자들도 하나님이 보낸 아들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아들을 배척하는 이유는 그들 마음이 교만하고 높아져서 모두 사단 손에 넘어가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땅에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는 율법 아래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다.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이방인들 앞에 다시 오시는 하나님 아들은 성령의 법 아래 살고 있는 영적인 백성(현 기독교인)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다시 오시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영적으로 오시는 하나님 아들을 믿게 되면 비로소 기독교인들 마음속에도 그리스도의 거룩한 성전이 세워지게 된다. 하나님은 이런 자를 당신의 자녀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자가 바로 알곡으로 하나님 곡간에 무사히 들어가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