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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의
토기장이가 정성들여 청자를 만들지만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가차 없이 그 토기들을 깨뜨리고 마는 것이다. 우리 눈에는 모든 그릇이 좋게 보일지 몰라도 토기장이 눈에는 그릇이 맘에 들지 않는 것이다. 토기를 깨뜨릴 수 있는 권한은 오직 토기장이의 손길에 달려 있다. 어느 누구도 그의 권한을 제한할 수는 없다. 설사 1300도가 넘는 온도에서 구워진 청자가 자신을 깨뜨리지 말라고 애원해도 그의 목숨은 오직 토기장이의 손길에 달려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목숨도 하나님 손에 쥐어진 진흙 한 덩이와 같은 처지다. 그런데 인간이 그걸 모르고 자신이 대단한 존재인 줄 알고 우쭐되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일수록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 이유는 자신은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고 하는 우월감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보낸 아들을 믿지 않고서는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토기장이가 하는 일을 자세히 보도록 말씀하신다. 예레미야가 토기장이 집에 가서 그가 하는 일을 자세히 보고나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일러 “진흙 한 덩이가 토기장이의 손에 달려있음 같이 너희 이스라엘도 내 손에 달려 있음을 알아야 한다(렘18:6)”고 말씀하신다.
예레미야는 비로소 하나님 뜻을 깨닫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토기장이의 비유를 들어 하나님 뜻을 구구절절 설명한다. 하지만 목이 곧고 마음이 강퍅한 이스라엘은, 도리어 예레미야에게 헛소리 그만하라며 끝까지 죄악에서 돌이키길 거부한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는 극에 달했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70년 동안 눈물과 한숨 속에서 살아야 했다. 어리석은 인간의 말로이다.
오늘날 우리 인간들 역시 하나님 손에 붙들린 진흙 한 덩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입으로는 모두가 먼지만도 못하고 티끌만도 못한 존재라고 말하면서 막상 하나님 말씀이 자신에게 주어지면 손바닥 뒤집듯 뒤집어 버리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살기 때문에 생기는 교만이다.
사도 바울도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자신을 의롭다고 하던 자이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만나고 난후 180도로 변하여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그가 참 빛을 받아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인간은 그리스도로 거듭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존재를 깨달을 수 없다. 더군다나 법(죄) 아래 사는 백성으로서는 자신의 존재를 더더욱 알 수 없다. 그래서 백성으로 살 때는 자신의 존재를 모르기 때문에 인간이 교만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인간의 어리석음을 보고,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9:21)”며 토기장이의 비유를 들어 하나님과 우리 인간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인간은 하나님 앞에 아무런 존재가 되지 못함을 뜻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한 마디로 인간은 모두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죄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율법에 따라 정직하고 살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1:16)” 율법을 받은 하나님 백성은 율법을 따라 살기 위해서 전심전력을 다한다. 그러나 육체를 입은 인간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따라 살기란 불가능하다. 법은 열 번 잘하다가 단 한 번만 잘못해도 모든 법을 범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야고보서 2:10)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이 의인을 만들기 위함이 아니고 죄인을 만들기 위함이다(롬3:20). 그런데 율법을 받은 백성들은 그런 사실을 모르고 율법을 지키기 위하여 전심전력을 다하는 것이다. 바로 이때부터 인간의 교만이 싹트기 시작하여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교만은 이방인들에 비해서 자신들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태어났다는 것과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들만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았다는 자긍심에 모두가 마음이 높아져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다가 그만 하나님이 보내주신 아들을 믿지 못해서 멸망으로 가고 말았다.
인간의 의(義)란 남과 비교하여 자신을 우월하다고 하는 것이다. 율법 안에 들어 있는 모든 규례들을 적용하여 그것으로 인간을 의롭게 만드는 것이다. 가령, 안식일 규례를 적용하여 안식일을 잘 지킨 자는 의인이고, 잘 지키지 못한 자는 죄인이 되는 것이다. 십일조를 드리는 일에 있어서도 어떤 자는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데 비해서 어떤 자는 이것저것 다 떼고 십일조를 드린다. 여기서도 의인과 죄인으로 갈리게 된다. 하물며 금식하는 것에서도 자기 의를 쌓는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 속에는 인간이 지켜야 할 규례들이 무수히 많다. 그 많은 율법의 규례들을 적용하여 인간을 의롭게 만들기도 하고 죄인을 만들기도 한다. 똑같은 하나님 백성으로 살면서 어느 누가 죄인이 되고 싶겠는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도 의인은 천국에 갈 것으로 믿었고, 죄인은 지옥 불에 떨어질 것으로 믿었다. 따라서 당연히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모두 의인이 되고 싶어했던 것이다.
율법의 의로 말미암아 탄생한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율법사들이다. 그들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다. 예나 지금이나 일반 성도들보다는 지도자들이 더 의롭게 되는 것은 그만큼 그들은 성경을 가까이 하고 또한 백성들을 가르치다보니 경건생활 또한 열심히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뛰다보니 어쩔 수 없이 자신도 모르게 율법을 거역하게 되어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아무리 경건생활을 열심이 하고 금식과 금욕생활을 많이 했다하더라도 그런 열심과 노력으로는 결코 의인이 될 수 없다. 의인이란 죄가 하나도 없어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모두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죄인들이다. 그들은 소와 양을 잡아 하나님께 제사하면 자신들의 죄가 도말되는 것으로 믿었지만 짐승의 피가 인간의 죄를 없애지 못한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들이 의인이 되려면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아들을 믿고 죄 사함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당시 자신을 의인이라고 믿고 있던 자들은 아들을 믿지 않아 모두 멸망으로 가고 말았다.
이런 일은 오늘날 성령의 법 아래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믿기 전 불신자로 살 때는 성령을 받지 않았으므로 성령의 법이 적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게 되자 그때부터 기독교인들도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인 율법(마음속에 주신 법)을 따라 살기 위해서 전심전력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부패한 기독교인들로서는 성령의 법을 온전히 따라 살 수가 없다.
기독교인들의 문제도 바로 여기서부터 잘못되기 시작한다. 하나님께서 기독교인들에게 성령을 주신 목적은 의인을 만들기 위함이 아니고 죄인을 만들기 위함이다. 그런데 성령을 받은 기독교인들이 그런 사실을 모르고 성령만 받으면 모두 구원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바로 이때부터 기독교인들의 구원관도 잘못되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인들 역시 남과 비교하여 자신을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성령의 법 안에 들어있는 모든 규례들을 적용하여 그것으로 자신을 의롭게 만드는 것이다. 가령 주일성수 하나만 보더라도 “주일을 잘 지켰는지 아니면 잘 지키지 못했는지”로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 한자로 구분한다. 십일조 또한 어떤 자는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데 비해 어떤 자는 이것저것 생활비 다 떼고 십일조를 드린다. 여기서도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로 구분된다. 하물며 금식하며 기도 많이 하는 것에서도 자기 의를 쌓는다.
기독교인들이 예수 이름으로 충성하고 봉사하는 것들 모두가 실상은 자기 의를 쌓기 위해서 하는 일이다. 기독교인들이 양로원이나 고아원을 방문하여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이나, 오갈 데 없는 노숙자들에게 밥 퍼주는 일을 하는 것도 실상은 모두 자기 의를 쌓기 위해 하는 일이다. “나는 이런 착한 일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 수고를 알아봐 주시고 내가 천국에 이를 때 상급을 많이 주실 거야.” 겉으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속마음은 모두가 이걸 바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일을 많이 했다고 해서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낸 아들을 믿어야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반복해서 말씀하시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 속에서도 바리새인 같은 자들이 수두룩하다. 특히 정통 교단에 몸담고 있거나, 집안 대대로 목사나 장로를 배출한 집안 출신들일수록 자신의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한다. 모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자들도 여기에 한 몫한다. 자신을 의롭다고 하는 자들은 항상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을 보면 무시하고 깔보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자신들이 지켜온 전통만이 절대 옳다고 판단하여 자신들과 교리와 생각이 맞지 않으면 무조건 이단으로 치부하고 만다.
그러나 우리가 바리새인들의 삶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그토록 조상들의 전통을 따지며 신앙에 열심을 내던 자들이 도리어 예수를 배척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더러운 죄인이라며 어느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자들이 도리어 예수를 더 빨리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인간이 자신을 의롭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의롭다고 믿게 되면 그때부터 인간의 교만은 하늘을 찌른다. 그들은 자신의 죄를 깨달아가라고 율법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율법에 따라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린 그것으로 모두들 의로워졌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 말처럼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자신에게 유익이 되나 율법을 잘못 적용하게 되면 도리어 자신에게 해가 되고 만다(딤전1:8,행18:13)”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법 속에는 인간이 마음속으로 지켜야 할 것들이 많다. 그런데 그 많은 법들을 종교 지도자들은 인간의 잣대로 들이대서 누구는 무엇을 했기 때문에 구원 받았다고 하고 또 누구는 무엇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 자로 낙인찍어 버리는 것이다. 똑같은 하나님 백성으로 살면서 모두가 천국가고 싶어 하지 어느 누가 지옥가고 싶겠는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가장 불행한 것은 돈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고, 세상에서 높은 감투를 쓰지 못해서 불행한 것도 아니며, 좋은 집에서 잘 먹고 잘 살지 못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죽어가는 것이 가장 불행한 것이다. 사도 바울이 만약 예수를 만나지 못하고 죽었다면 그도 가장 불행한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만나고 나서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는 “예수를 아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지식(빌3:8)”이라고 고백한다.
마음속의 죄를 사함 받아야 온전한 구원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면 어떤 사람은 우리가 죽을 때 예수께서 우리 죄를 다 사해주신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우리의 육체가 사라지고 나면 우리의 죄를 전가할 곳이 없어지기 때문에 죄가 그대로 남게 되어 부활할 때 죄의 몸으로 부활하게 된다. 만약 우리가 죽고 난 후에도 죄가 사해진다면 지옥 갈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런 말은 마귀가 인간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꾸며낸 말이다. 기독교인들은 절대 이런 말에 속지 말아야 할 것이다. 원죄이든 자범죄이든 우리가 살아 있을 때 모두 사함 받아야 온전한 구원에 들어갈 수 있다.
결국 인간이 쌓아 만든 의는 자신이 스스로 노력하여 만든 것이므로 하나님 앞에 원수가 될 뿐 아니라, 자신이 쌓아 만든 의로 말미암아 교만에 빠져서 마귀에게 쓰임 받다가 멸망으로 가게 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는 인간들에게 먼저 법을 주시고 죄 아래 가둔 다음 당신의 아들을 보내서 아들을 믿고 나오는 자들을 하나님 자녀삼아 주시고 그런 다음 아들의 은혜로 살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현재 누구 의로 살고 있는가를 스스로 자신을 확증하여 보시라!
진짜 그리스도로 거듭난 자는 자신의 의를 내세우지 않고 종교나 인종에 차별을 두지 않고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는다. 그리하여 이 세상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들고 그리스도 앞으로 달려 나오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그들의 모든 죄를 사해주시고, 그들을 모두 영생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는 것이다.
하물며 당시 이방인이었던 수로보니게 여인과 백부장도 예수 앞에 달려 나가서 문제를 해결 받았다(마15:21-28,막8:24-30,마8:5-13). 마찬가지로 오늘날 불신자로 살던 사람도 또는 불교나 이슬람교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도 자신의 문제를 들고 하나님 아들을 앞으로 달려 나오기만 하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거짓 영에게 속아 이단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도, 자신의 마음속에서 날마다 먹고 마시는 죄악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이라도, 자신이 믿고 있는 교단 교리가 마음속의 죄 문제를 해결하여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즉시 주님 앞으로 달려 나오기만 하면 주님은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영생에 이르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