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곡과 쭉정이
하나님께서는 만물 가운데 우리 인간들이 깨닫고 돌이킬 만한 것들을 많이도 예지해 주셨다. 그러나 아둔한 인간은 하나님께서 예지해 주신 것들을 깨닫지 못하고 그냥 흘러 보낸다. 설사 어떤 자가 만물을 보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다고 해도 그것을 실천에 옮기지 못해서 망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무덥고 지루하던 여름이 지나고 이제 바야흐로 수확의 계절인 가을이 돌아왔다. 세찬 비바람 속에서도 용케도 잘 견디어 낸 곡식들도 이제 제각각 열매를 내고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개중에는 잘 여문 곡식도 있겠지만, 잦은 비와 태풍으로 인해서 꽃술이 떨어져 속이 덜 찬 쭉정이도 있을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쭉정이는 속이 꽉 차지 못하여 주인의 곡간에 들어가지 못하고 버려지게 된다.
수확 때가 되어 고개를 내민 벼를 바라보면 사람이 먹지 못할 피(가라지)도 함께 섞여 있다. 논에서 함께 자랄 때는 벼와 너무도 똑같아 구분이 잘 안되어 그냥 내버려 두었는데, 모두 고개를 내밀면 벼가 아니고 가리지인 경우가 많다. 농부는 이제 가라지의 정체를 안 이상 그대로 논에 내버려 둘 수가 없다.
농부가 벼를 수확하기 전에 먼저 논에서 가라지를 뽑아내야 하는 이유는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가는 추수 때 알곡 속에 섞일 염려가 있고, 또한 그 씨가 논에 떨어져 다음 해에 또 다시 자라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가라지는 누가 일부러 심지도 않았는데도 그 다음 해에도 어김없이 또 다시 자라는 것을 보면 생명력이 끈질긴 것 같다. 곡식에도 보면 알곡이 있고 쭉정이도 있고 가라지가 있듯이,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알곡이 있고 쭉정이와 가라지가 있다. 이러한 사람들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먼저 곡식에서 알곡과 쭉정이와 가라지를 찾아내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농사를 짓는 농부가 봄에 모(논)판에 볍씨를 뿌려서 벼가 어느 정도 자라나면 그 모를 이 논 저 논에다 옮겨 심는다. 그리고 여름에 되면 김매기를 열심히 해서 온갖 잡초들을 제거한다. 그리고 벼가 잘 자라도록 비료도 주고 병충해를 입지 않도록 농약도 열심히 뿌려준다.
벼가 자랄 때는 보면 꼭 피도 함께 자라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 피라는 녀석은 어찌나 벼와 흡사하게 생겼는지 그냥 일반 사람들 눈으로 봐서는 벼와 전혀 구분이 안 된다. 여름에 밀짚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농부들이 논에 들어가서 피사리라고 하는 일을 하는데, 그것은 이 가리지가 벼에 양분을 모두 빼앗아 먹어 버리기 때문에 그것을 조금이라도 방지하고자 하여 미리 피를 뽑아 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전문 농사꾼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행여나 일손을 돕겠다고 농사도 지어보지 않은 도시 풋내기들이 논에 들어가서 이 짓을 하다가는 영락없이 멀쩡한 벼를 죄다 뽑아놓게 된다. 그만큼 이 피라는 녀석을 골라내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이 녀석은 꼭 벼 포기 사이에서 자생을 하는데 뽑아보면 오히려 벼보다 뿌리도 튼튼하고 줄기도 단단하게 생겼다. 그러다보니 병충해를 입는다 해도 벼가 먼저 죽지 이 녀석이 먼저 고사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농부가 뿌려준 양분을 모두 빼앗아 먹고 무럭무럭 자란 가라지도 가을이 되면 어김없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 고개를 내밀게 되는데, 그 모양을 보면 벼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농부들도 여름에는 분간하기가 힘들어 그냥 놔두었다가 가을이 되어 피들이 고개를 내밀 때쯤에는 어김없이 논에 들어가서 그들의 모조리 뽑아내서 모조리 불살라 버린다.
쭉정이와 가라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쭉정이는 알곡과 근본적으로 씨는 같으나 속이 여물지 못해서 그리 된 것이지만, 가라지는 본래부터 그 씨가 다르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가라지에 대하여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마13:25)”라고 말씀하신다. 논에서 함께 자라고 있는 피를 보면 벼와 너무도 똑같아서 구분하기가 힘들다. 가라지는 그만큼 철저하게 자신의 신분을 위장하고 알곡 속에서 자라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식물을 통해서 알곡과 가라지의 성장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런 장면은 우리의 신앙생활도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그래서 예수님도 가라지의 비유를 들어서 알곡과 가라지의 성장과정을 설명해 주셨다. 예나 지금이나 가라지는 언제나 진짜보다 더 확실하게 뿌리와 줄기도 튼튼하게 보인다. 그래서 진리에 서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거짓 목사와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고 속아서 그들을 따라 나선다.
예수 당시에도 알곡인 예수의 말씀을 듣고 좇는 사람들보다는 쭉정이나 가라지에 속하는 자들의 말을 듣고 쫓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고, 또한 쭉정이와 가라지들이 훨씬 더 세상에서도 득세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자신들이 진리에 서 있지 못하다보니 자기보다 나아보이고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마치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신 줄 알고 그리로 모여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논에서 가라지가 자랄 때 그의 모습을 살펴보았듯이 가라지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들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쭉정이 신자는 똑같이 신앙생활을 했지만 영적인 아들을 믿지 못하여 마음속의 죄를 사함 받지 못한 자이다. 마음속의 죄를 사함 받지 못하게 되면 자신의 옛 사람(죽은 영)이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 이는 마치 같은 논에서 똑같은 벼로 자랐지만, 그만 비바람과 태풍을 견디지 못하고 꽃술이 떨어져 속이 덜 찬 것과 같은 이치다.
인간이 우매한 것은 자신이 현재 가라지에 속해 있는지 또는 참 곡식에 속해 있는지도 모르고 거짓들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정체라도 볼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자신의 얼굴을 비쳐줄 영적인 거울이 이 세상에 없다 보니, 자신의 존재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고 거짓들을 따라 살고 있는 것이다. 설사, 빛 되신 하나님 아들이 오셔서 자신의 신분이 누구인가 빛을 비쳐 주려고해도 그것을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것이 어둠속에 살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제 이런 일들도 가을이 되면 모두 고개를 내밀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정체가 누구인가 확연히 들어나게 될 것이다. 아까 논에서 벼와 함께 자라던 피라도 가을이 되니까 어쩔 수없이 고개를 내밀어 자신의 정체를 밝히듯이, 인간들 또한 추수 때가 되면 누구나 할 것이 고개를 내밀어 자신의 정체를 백일하에 들어나게 된다. 그 때는 피할 길이 없다. 또한 아니라고 변명할 길도 없다. 이미 고개를 내밀고 가라지라는 열매가 맺혔는데 아니라고 떼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까 농부가 논에 들어가서 미리 가라지의 뿌리까지 뽑아내서 모조리 불살라 버리듯이, 쭉정이와 가라지 신자들을 미리 골라내서 불속에 처넣게 된다. 믿는 자들이 불신자들보다도 먼저 심판을 받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불신자들은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니까 하나님 백성들을 더 괴롭히기라도 했지만 믿는 자들은 오히려 믿는다는 그것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더욱 더 괴롭혔기 때문이다. 또한 맛있는 양분은 죄다 빼앗아 먹고 자랐기 때문에 이에 따르는 심판 또한 크다는 것이다.
율법 아래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모두 알곡이라 믿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이 알곡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죄인으로 태어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곡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께서 보내주신 아들을 믿고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율법 아래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소와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리기만 하면 자신들의 죄가 모두 도말되어 알곡이 되는 것으로 착각했었다. 그러나 성경은 짐승의 피가 인간의 죄를 없이하지 못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율법 아래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동안 아무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온갖 율법의 규례를 다 지키며 살았다 해도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를 믿지 않으면 그들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게 되어 구원에 이를 수 없다.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히브리서 10:4)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유대인처럼 자신들을 하나님의 자녀요 알곡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하나님 앞에 온갖 제사를 다 드리고도 알곡이 되지 못했듯이, 기독교인들 역시 예수 이름으로 아무리 열심히 예배를 드렸어도 그런 행위로는 알곡이 될 수 없다. 기독교인들 또한 알곡이 되기 위해서는 이방인들 앞에 영적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믿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
열매가 맺히기 전에 원수들이 뿌려놓은 씨를 받아서 가라지로 성장하면 큰일이다.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영생의 주인이 들려주는 말씀에 순종해서 내안에서 주인이 보시기에 합당한 열매를 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나 역시 불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이 믿지 않던 예수를 믿고 성령까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알곡이 되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율법 아래 살던 유대인의 삶과 아무런 법도 없이 개, 돼지처럼 살던 이방인의 삶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는 오직 율법 아래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육체로 지은 죄(율법을 거역한 죄)만 해결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믿는 자들이 법을 따라 살지 못하게 되면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영적인 백성들 또한 똑같이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게 된다. 그 증거가 바로 기독교인들의 마음이 모두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믿는 자들의 마음이 점점 더 강퍅해지고 있는 현실이다. 이는 마치 율법을 범한 유대인들이 육체로 병들어 가던 것과 같은 이치다.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성령의 법을 어긴 자들을 하나님의 저주에서 풀어주기 위해서는 이방인들 앞에도 하나님의 영적인 아들이 오셔서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셔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 앞에도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시는 이유는 바로 영적인 백성들이 마음속으로 지은 자범죄를 해결해 주도록 하기 위해서다. 영적인 백성들은 바로 이렇게 오시는 하나님 아들을 믿어야 비로소 성령을 거역한 마음속의 죄를 사함 받고 온전한 구원에 들어갈 수 있다.
가라지들의 특징은 대부분 사람들이 잘 이해되지 않는 계시록 말씀들을 이용하고 있다. 계시록은 하나님께서 감추어둔 비밀의 책이며, 어린 양이 열지 않으면 결단코 열리지 않는 책이다. 그런데 마귀의 사주를 받는 가라지들은 교묘히 계시록 말씀을 이용하여 교인들을 미혹하고 있다. 그들은 144,000명 속에 들지 못하면 구원이 없다고 말한다. 이는 전혀 터무니없는 말이다.
그들이 이런 말씀을 이용하는 것은 순진한 교인들을 미혹하는 데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사실 계시록에서 언급한 144,000명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맡은 하나님 아들들을 두고 하는 말로, 앞으로 하나님께서 이들을 통해서 전 세계에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을 전하게 될 것이다. 이방인들은 하나님 아들들이 하는 말을 믿어야 온전한 구원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사단의 하수인들은 이것을 구원 받은 숫자로 살짝 바꿔서 그것으로 교인들을 겁주며 믿도록 강요하고 있다. 그래야 자기 교회로 교인들이 몰려올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가라지는 자신이 가라지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 만약 자신이 가라지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알면 그곳에 있겠는가?
사실 여기에는 기성교회들이 성도들을 바르게 교육하지 못한 책임이 크다.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았어도 늘 불안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는 기성교회 교인들로서는 교회에서 자신들의 답답한 마음을 속 시원하게 풀어주지 못하자 뭔가 좀 더 확실한 구원을 붙잡기 위해서 이곳저곳을 찾아 헤매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이 세상 어디에도 인간의 답답한 마음을 풀어줄 분은 없다. 그것을 해결해 줄 분은 오직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영적인 아들뿐이다.
마귀도 그런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도 진짜 하나님 아들이 오시기 전에 어떻게 하든 한 명이라도 더 교인들을 미혹하여 자기 발아래 두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도 예수가 오실 것을 미리 알고 마귀가 거짓 선지자들을 이용하여 성도들을 미혹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
추수 때가 되면 모든 식물들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듯이 이제 이방인들 앞에도 영적인 하나님이 아들이 오시게 되면, 가라지들을 비롯한 모든 거짓 지도자들 또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가라지들은 알곡을 수확하기 전에 먼저 추수꾼들에 의해 뽑혀서 불속에 던져질 것이며, 그리스도로 거듭나지 못한 쭉정이 또한 땅에서 버림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오신 아들을 믿는 자들은 알곡이 되어 주인의 곡간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이방인들의 마지막 구원과정이다. 이 과정이 모두 끝나면 악이 관영한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불로 심판을 하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