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과 아벨
우리는 가인이 드린 제사와 아벨이 드린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목적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그 의도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은 후 그 결과로 죄악이 어떻게 인간들을 통해서 어떻게 역사하는지 그 과정을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 아담에게는 가인과 아벨 이외에도 여러 자식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창세기 4장 에 기록되어 있지만, 성경은 다른 자식들은 일절 배제한 체 오직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만 기록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선한 자와 악한 자를 구별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가인과 아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자를 선하게 여기시고 또 어떤 자를 악하게 여기시는지 자세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
아담이 살던 때는 세상이 창조된 지가 얼마 되지 않아 각자가 자신이 가꾼 소산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 농사를 짓는 자는 땅의 소산물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고 목축업을 하는 자는 짐승으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다. 만약 그 당시에도 고기 잡는 어부가 있었다면 그는 바다에서 잡은 수산물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창세기 4장을 보면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그리고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라!”라고 기록되어져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재물은 열납한 반면 가인의 재물은 열납하지 않은 것이다. 이를 두고 기독교인들은 아벨은 예수를 상징하는 양을 재물로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벨의 재물은 열납하고, 가인은 예수와 상관없는 곡식으로 드렸기 때문에 가인의 재물은 열납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가인의 재물을 열납하지 않은 것이 곡식으로 드렸기 때문에 그 재물을 열납하지 않은 것일까?
만약 기독교인들 말대로 하나님께서 아벨은 예수를 상징하는 양으로 드렸기 때문에 그 재물은 열납하고 가인은 곡식으로 드렸기 때문에 그 재물을 열납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스스로 하나님이 될 자격이 없는 분이시다. 그 이유는 하나님도 결국 인간이 드리는 재물이나 탐하는 분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가 선물이라도 가져오게 되면 가져온 선물이 비싸고 좋은 것이냐에 따라 상대방을 평가하게 된다. 또한 가져온 선물이 많고 적음에 따라서도 상대방을 평가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라 부패한 인간과 달리 마음을 담아서 드린 예물이 아니면 기뻐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라 인간의 마음 중심을 살피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재물을 드리는 사람 마음중심을 보고 그 재물을 열납하는 분이 아니라 재물의 상징성만 보고 재물을 열납하는 분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이런 시각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모든 기독교인들이 마음도 없이 무조건 예배당에 나가서 예수 이름만 부르면 모든 죄를 사함 받고 모두가 구원에 이르게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유대인들이 마음도 없이 무조건 예루살렘 성전에 나가서 소와 양을 잡아 하나님 앞에 제사만 드리면, 그것으로 자신들의 모든 죄가 도말되어 천국에 이를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4장에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기록하게 한 것은,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어떤 마음과 자세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아주 분명하고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라면 적어도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그 다음으로 인간의 본질을 깨달아야 한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그런 사람은 결국 입술로만 하나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되고 만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결코 인간들처럼 외모나 재물을 탐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벨과 더불어 그의 재물을 열납하셨던 것은, 예수를 상징하는 양을 드렸기 때문이 아니라 아벨의 정성어린 마음을 보고 그 재물을 열납하셨던 것이다.
아벨이 예물을 준비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아벨은 어미 양이 새끼를 밸 때부터 벌써 그 새끼가 태어나면 하나님 앞에 재물로 드릴 것이라 마음먹었다. 아벨은 새끼를 가진 어미 양을 돌보는데도 온갖 정성을 다 쏟았다. 그리고 마침내 새끼 양이 태어나자 아벨은 마치 자기 자식이 태어난 것처럼 기뻐하며 새끼 양을 친자식처럼 돌보았다. 그리고 그 새끼 양을 하나님 앞에 재물로 드렸던 것이다. 하나님은 아벨의 그런 마음과 정성을 기특하게 여긴 것이다. 그리하여 아벨과 더불어 그의 재물을 열납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창4:4)
반면 하나님께서 가인과 더불어 그 재물은 열납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또한 기독교인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가인이 예수와 상관없는 곡식을 드렸기 때문이 아니라 가인의 정성어린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재물을 열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가인이 하나님 앞에 드릴 예물을 준비하는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가인은 농사짓는 자였기 때문에 만약 가인이 하나님 앞에 드릴 예물을 준비하려고 마음먹었다면 그는 땅에 뿌릴 씨앗을 준비하는 과정부터 마음가짐이 달랐어야 했다.
그는 농사짓는 자니까 당연히 신실한 씨앗을 구별하고 준비해서 좋은 땅에다 씨앗을 뿌리고 새싹이 올라오면 들짐승이나 산새들이 와서 쪼아 먹지 못하도록 잘 돌보아 주는 것이다. 그리고 잡초가 나면 잡초를 제거해주고 가뭄이 들면 자신이 마실 물이라도 주어서 곡식이 잘 자라도록 온갖 정성을 다해서 보살펴 주어야 한다. 정성으로 가꾼 곡식이라면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만약 가인이 이런 정성어린 마음으로 곡식을 가꾸고 기른 것을 하나님 앞에 재물로 드렸더라면 왜 하나님께서 가인과 더불어 그 재물을 열납하지 않았겠는가?
어떤 부모에게 자식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부자로 살고 하나는 가난하게 사는 것이다. 세월이 흘려 부모가 회갑을 맞이하게 되었다. 부자 아들은 돈이 많으니까 이것저것 시장에서 잔뜩 많은 선물들을 사가지고 왔다. 그러나 가난하게 사는 아들은 돈이 없다보니까 시장에서 천을 사다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하여 정성스럽게 부모님 옷을 만들었다. 이때 두 아들의 선물을 받은 부모는 어느 쪽에 더 마음을 두었을까요? 가인 같이 마음으로 사는 부모라면 시장에서 이것저것 선물을 잔뜩 사가고 온 아들을 좋다할 것이나, 아벨 같은 마음을 가진 부모라면 당연히 한 땀 한 땀 손수 바느질을 하여 직접 옷을 만들어 온 아들을 좋아할 것이다.
오늘날 황금만능주의로 가다보니 돈이면 무엇이든지 다 해결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부패한 마음이다. 부패한 인간의 마음은 이 세상 어떤 것으로도 해결되지 않는다. 마음이 부패한 인간이 공부를 하면 할수록 또는 세상에서 지식을 터득하면 할수록 인간의 마음은 더 부패되어 간다. 문화가 발전하면 할수록 인간이 더욱 더 타락하게 되는 이유도 바로 이런 원리 때문이다. 우리는 가인의 삶을 통해서 인간이 어떻게 악한 길로 들어서게 되는 가를 보다 정확히 깨달을 필요가 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그러하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그러느뇨?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세기 4:6-7)
위 말씀을 보면, 가인이 아벨은 재물을 받아주고 자신의 재물은 받아주지 않았다하여 하나님에게 화를 냈다는 것이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그러하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그러느뇨?” 이를 다른 말로 해석하면, 하나님에게 분을 내고 얼굴을 붉히며 대들었다는 말이다. 그것을 지켜본 하나님께서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며 가인에게 묻는다. 이를 직역하면 “네가 아벨처럼 정성어린 마음으로 예물을 준비했더라면 어찌 하나님이 네 재물을 받지 않았겠느냐”하시는 말이다.
그러나 가인은 자신이 마음으로 예물을 준비하지 않은 것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께서 아벨의 재물은 받고 자신의 재물은 받아주지 않았다하여 성질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네가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이 말을 지역하면, 네가 만약 아벨처럼 정성어린 마음으로 재물을 준비하지 않았다면 죄가 네 마음속에 들어갈 것이다. 죄가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간다는 말은, 곧 악령이 너를 지배하게 될 것이란 말이다. 결과적으로 가인은 잘못을 뉘우치기 보다는 스스로 악한 길에 들어서고 말았다.
우리는 가인과 아벨의 행동을 보면서, 악한 자나 선한 자가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어떤 행동을 보이느냐에 따라서 악한 길로, 또는 선한 길로 나아가게 됨을 보게 된다. 인간의 선과 악을 구별하는 방법은 반드시 하나님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인간이 선한 자와 악한 자를 구별하는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함부로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행동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이런 깊은 뜻을 헤아리기 보다는 무조건 아벨은 예수를 상징하는 양을 드렸기 때문에 아벨의 재물을 받은 것이고, 가인은 곡식을 드렸기 때문에 그 재물을 받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악한 영이 교묘하게 인간들을 속이고, 하나님의 본래 목적을 상실시키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다. 악한 영의 교묘한 술책에 속아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마음도 없이 예물을 드리고 마음도 없이 예배를 드리면서도 무조건 입술로 예수 이름만 부르면 모두가 구원 받은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오늘날 제 아무리 예수 이름을 많이 불러도 마음 없이 드려지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결코 기쁘게 받지 않으신다. 또한 제 아무리 많은 예물을 드려도 마음 없이 드려지는 예물은 하나님께서 열납하지 않으신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 이름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분명하나 마음도 없이 예수 이름만 부른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무조건 기뻐하지 않으신다.
성경에 하나님은 인간들과 달리 외모를 살피시는 분이 아니라 마음 중심을 살피시는 분이라고 누차 강조하고 있지만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그런 말씀은 성경에서나 하는 소리로 받아들이고 자신들과는 전혀 무관한 소리로 듣고 있다. 그러다보니 너도 나도 할 것이 없이 모두가 예수 이름만 부르면 모든 것이 형통케 되는 요술 방망이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예수 이름을 빙자하여 자신의 영달과 안위를 도모하려는 자들이 부지기수로 많은 것이다.
위 말씀 내용을 보면 결코 재물 때문에 아벨을 열납하신 것이 아니라 아벨의 마음 때문에 재물을 열납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가인 역시 곡식으로 드려서 재물을 열납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가인의 마음이 담겨 있지 않아서 재물을 열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물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예물을 눈여겨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보신다는 것이다. 아벨은 하나님 앞에 드릴 예물을 준비하기 위해서 양이 첫 새끼를 배는 순간부터 하나님 것이라고 점찍어놓고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준비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아벨의 마음을 보고 아벨과 더불어 그 재물도 받으신 것이다.
그러나 가인은 농사짓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다가 하나님 앞에 제사드릴 때가 오자 대충 밭에서 곡식 한단을 베어서 하나님 앞에 드렸을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오늘날 가인과 같이 준비되지 않은 마음으로 예배당에 나가 예물을 드리게 되면 하나님은 결단코 그런 예물과 예배를 받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제 아무리 예수 이름으로 많은 예물을 드리고 많은 예배를 드린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기뻐 받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단돈 천원을 하나님 앞에 예물로 드릴지라도 그것을 아벨처럼 처음부터 경건한 마음으로 준비하고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드린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과 더불어 예물을 열납하시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물을 열납하신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축복하시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모두 아벨과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고 예배를 드린다면 한국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모두가 놀라운 영적인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가인과 같이 처음부터 준비되지 않은 마음으로 예물을 바치고 예배를 드리다보니까 겉만 번지르르한 성도들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외적으로는 교회가 성장한 것처럼 보이지만 교회 안에 있는 지도자들과 성도들은 모두가 속이 썩을 대로 썩어 그 냄새가 진동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수많은 교회가 속으로는 가인과 같은 행동을 일삼으면서도 겉만 그럴듯하게 꾸며 아벨로 둔갑(예수 이름으로 포장)하여 온갖 악행을 일삼고 있다. 당을 짓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교파와 교단을 나누는 일 모두가 실상은 자기 유익을 찾고자 해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가인 같은 마음을 자들은 교인들 숫자 불리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축복인양 떠들어대고 있지만 이 또한 명분 쌓기에 불과할 뿐 실상은 자신들의 명예를 드높이고 더 나아가서 자신들을 세상에 과시하기 위한 선전수단에 불과하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아들로 말미암아 이루어져야 하는데 아벨 같은 온전한 마음도 같지 못한 자들이 어떻게 성도들의 죄를 사하고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겠는가?
누구나 예수 이름을 부를 수는 있다. 하지만 가인처럼 마음도 없이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는 절대 천국 문을 열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벨처럼 마음으로 천국 문을 두드리는 자들에게는 언제든지 주님께서 만나 주실 것이다. 오늘날 가인과 아벨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가인과 아벨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자신이 가인의 길에 들어설 것인가? 아니면 아벨의 길에 들어설 것인가 하는 것은 순전히 자신의 몫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 앞에도 반드시 영적인 하나님 아들을 보내주실 것이다. 이것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천지가 변해도 이 말씀은 변하지 않는다. 그때 가인처럼 마음도 없이 예수를 믿었던 자들은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도리어 화를 내며 얼굴을 붉히게 될 것이고, 아벨처럼 마음으로 예수를 믿었던 자들은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따르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상 대대로 양을 치며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양은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존재들이다. 예수 역시 어릴 때부터 자기 민족들이 양을 치며 살아가는 것을 지켜보며 자랐다. 그래서 양의 특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연유로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고 나서 바로 양과 목자의 비유를 들어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양은 오직 주인의 음성만 듣고 따를 뿐, 절대 타인의 음성은 듣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10:27)!”하고 말했을 때 예수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았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의 출신 성분만 따지며 “당신이 언제까지 우리를 의혹케 할 것이냐”며 예수께 꼬치꼬치 따져 묻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오늘날에도 아벨처럼 마음으로 믿었던 자들은 영적인 아들을 만나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나 가인처럼 마음도 없이 믿었던 자들은, 아들을 눈으로 직접 보고도 자기 생각을 내려놓지 못해서 아들을 믿지 못하는 기이한 현상이 생기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들이 알곡과 쭉정이로 나누어지게 되는 과정이다. 따라서 지금은 기독교인 모두가 영적인 깊은 잠에서 깨어나서 자신이 성령을 거역한 죄인이란 사실을 뼛속 깊이 깨닫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주님이 오셨을 때 그마나 주님 발 앞에서 “나는 죄인입니다”하고 무릎 꿇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