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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 시작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거하는 땅에 기근이 들자 그 기근을 피하여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그곳에서 430년을 눌러 살게 된다. 430년 동안 그들의 숫자가 모래알처럼 불어나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애굽을 탈출시키신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바다를 건너고 바란 광야를 지나 시내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모세를 통해 율법을 받는다. 애굽(사단)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았다는 말은 비로소 하나님 백성으로서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모세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그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뒤로하고 여호수아를 따라 요단강을 건너고 여리고성을 지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곳에 정착을 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뒤로하고 여호수아를 따라 나서게 했던 것은 장차 예수가 오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할 것을 예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을 짓도록 명령하신다. 이스라엘 열두지파들은 각기 자신들이 나누어 받은 땅에서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였다. 그 후 태어난 유대인들은 하나님 백성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따로 전도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 백성이 되었다고 해서 곧장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백성들은 율법을 지켜야할 의무를 부여받게 된다. 이때 하나님 백성으로서 꼭 지켜야할 법을 지키지 못했을 때는 하나님의 저주로 말미암아 몸에 병이 들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유독 병든 자가 많았던 것은 바로 율법을 거역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몸에 병이 들지 않았다 해도 인간은 온전히 율법을 지킬 수가 없었다. 법은 백 번 잘하다가 단 한 번만 잘못해도 모든 법을 어기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생각은 정반대로 진행된다.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살아서 내려왔더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 아들이라는 자가 십자가에서 살아나지 못하고 도리어 죽어버렸으니 당시 유대인들로서는 예수를 더더욱 하나님 아들로 믿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가장 극악무도한 자를 처벌하는 형벌이 바로 나무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예수가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이유는 그런 형벌을 당하셨던 것이다. 설사, 예수가 누명을 쓰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되었더라도 죄가 없는 하나님 아들이라면 유대인들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살아서 내려와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진정한 메시아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살아 내려온 것은 고사하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버렸으니 당시 유대인들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저렇게 된 것이라 믿었을 것 아니겠는가?
물론 예수가 돌무덤에 묻힌 지 삼일 만에 부활하였지만 당시 유대인들로서는 그런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들 생각에는 십자가에서도 살아나지 못한 자가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럴 것 같았으면 진작 십자가에 매달려 있을 때 살아 내려왔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유대인들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공감이 가는 내용이다. 아마도 그런 생각 때문에 유대인들이 더더욱 예수를 믿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문이 사람들의 입을 타고 삽시간에 퍼져나가는 것이었다. 예수를 죽인 당사자들은 그런 사실을 극구 부인했지만 예수로부터 병 고침을 받았거나 혹은 예수를 진정한 메시아로 믿었던 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바울은 이 사실을 전하고 싶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자를 믿는 것이 어리석은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일 것이나, 믿는 우리에게는 구원이라는 것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린도전서 1:18)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예수가 죽어야 우리 인간이 다시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어둠 속에 사는 인간의 한계이다. 인간이 제 아무리 지혜가 뛰어나고 지식이 풍부하다 해도 하나님의 섭리를 바로 알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려면 반드시 하나님 아들이 와서 인간들을 깨우쳐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바로 뜻을 알 수 없다.
이는 오늘날 성령의 법 아래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신, 구약 성경을 보기 때문에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기독교인들 역시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제대로 알고 있는 자가 없다. 그 이유는 아직 기독교인들 앞에는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영적인 아들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약(예수)시대에 사는 사람들 입장에서 볼 때 구약성경에 기록된 내용은 모두가 그리스도 앞으로 안내하는 몽학 선생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다 때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새로운 성전으로 예수가 오셨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새로 오신 성전(예수)을 믿지 않고 자꾸만 낡은 건물(성전)속에 머물러 있으려 한다면 이는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물론 새로운 성전이 오시기 전까지 손으로 지은 건물이 참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성전이 오시기까지 한시적으로 지어진 것이므로 더 이상 거기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영적인 백성들 입장에서 볼 때 신약 성경에 기록된 내용은 모두가 이방인들 앞에 영적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말씀이다. 그러다 이제 때가 되어 이방인들 앞에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적인 아들을 보내 주셨다. 그런데 기독교인들도 유대인들처럼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영적인 아들을 믿으려하지 않고, 자꾸만 사람 손으로 지은 건물(예배당)에 모여서 예배 드리기를 좋아한다. 이는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지금까지는 예배당이 기독교인들에게 참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이제는 성전의 새로운 주인이 오셨으므로 더 이상 예배당을 찾아 예배드리는 행위를 그치고 새로운 주인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속에 모셔 들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마음속에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천국인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건데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들에게 알맞은 율법과 복음이 주어져 있고, 기독교인들에게는 기독교인들에게 알맞은 율법과 복음이 주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영적인 백성들에게 적용되는 ‘영적인 율법’과 ‘영적인 복음’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 자꾸만 이스라엘 백성들에 관한 이야기만 하고 있으니까 기독교인들이 식상해 하고 있는 것이다. 똑같은 말씀에 식상한 기독교인들이 좀 더 새로운 말씀을 찾아 이 교회 저 교회를 떠돌아 다녀보지만, 어느 교회를 가더라도 모두 똑같은 말씀을 하기 때문에 영혼의 갈급함을 채우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좀 더 새로운 말씀을 찾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급기야는 가짜 그리스도(이단)에게 속아서 인생을 망치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려면 장차 이방인들 앞에 보내 주실 영적인 하나님 아들을 믿고 그리스도로 거듭나야 비로소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제대로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죄악의 담이 가로막고 있어서 그 담을 허물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바로 나아갈 수 없다. 이 죄악을 담을 허물어줄 수 있는 분이 바로 하나님 아들이다. 율법 아래 살던 유대인들은 육체를 입고 오신 아들을 믿어야 하나님 앞에 무사히 나아갈 수 있고, 오늘날 성령의 법 아래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영적으로 오시는 아들을 믿어야 비로소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나아갈 수 있다.
바울은 계속해서 어둠속에 사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1:22-24). 바울의 이 말을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시켜보면 기독교인들 역시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하나님의 표적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믿는 자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표적을 구하는 까닭은 마음으로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표적이라도 보고 하나님을 믿어보려는 이유에서다.
당시 헬라인은 오늘날 믿지 않는 불신자에 해당된다. 불신자는 당연히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세상에서 지혜와 지식을 찾으려 한다. 바울이 유대인과 불신자들 앞에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죽은 자를 전한다하여 거리끼게 되고, 이방인들은 아무 의미 없는 나무 십자가를 전한다하여 미련하게 생각하더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바울의 이 말을 오늘날 기독교인들과 불신자들에게 똑같이 적용시켜 보았더니 기독교인들 역시 큰 교회와 더불어 유명한 목사들만 선호할 뿐 하나님이 보낸 아들은 너무 보잘 것 없게 생겼다하여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불신자들 역시 큰 교회 유명한 목사라면 몰라도 교회도 작고, 목사도 전혀 볼품없는 자를 하나님 아들로 믿고 따르는 것이 아주 미련한 짓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감추어진 비밀이다. 우리 생각 같아서는 하나님 아들하면, 굉장히 크고 화려한 곳에 오실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미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께서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라면 그는 고운 모양도 없고 좋은 풍채도 없으며 우리가 보기에 전혀 흠모할 만한 것이 없는 분이라는 것이다(사53:2). 또한 그는 마구간에서 태어났으며 이 세상에 머리 둘 곳이 없는 분이시다(눅2:7,마8:20). 이것만 보더라도 하나님 아들은 아주 천한 곳에 오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인간들은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크고 화려한 교회를 좋아한다. 그리고 말씀을 전하는 목사 역시 많은 학문과 더불어 지식을 겸비한 자로서 좋은 인격과 모든 덕목을 고루 갖추고 있는 자라야 하고 그 다음으로는 자상해야 하며, 인자한 모습으로 말씀을 전하는 자라야 사람들에게 존경 받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보낸 아들이라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와는 정반대로 전혀 보잘 것 없고 무식한 자를 아들로 선택해서 보내는 것이다. 그러니 누가 그런 자를 하나님 아들로 쉽게 믿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아래 말씀과 같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전서 1:27-29)
오늘날 기독교인들 중에서 장차 하나님 아들로 거듭나고 싶은 분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보내 주시는 영적인 아들을 믿어야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뵐 수 없고, 하늘나라에도 들어갈 수 없다. 그 이유는 앞서도 말했듯이, 기독교인들 스스로가 성령을 거역하고 제 멋대로 살았기 때문에 그 죄악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거역하고 지은 죄악의 담을 허물어줄 수 있는 분으로 오직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영적인 아들만이 그 죄악의 담을 허물어줄 수 있다. 따라서 성령을 거역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보내 주시는 영적인 아들을 믿어야 하나님과 가로막혔던 죄악의 담을 허물고 아들을 따라 하나님 아버지를 뵐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성령을 거역한 죄로 말미암아 기독교인들은 마지막 날에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