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과 아들
다윗의 아들 솔로몬 왕은 모든 사람들보다 지혜가 뛰어난 인물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생각하사 그에게 부귀영화와 더불어 모든 사람보다 뛰어난 지혜까지 주셨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그만큼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이 그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금은보화를 바리바리 싸들고 솔로몬 왕을 만나려 왔었다는 일화는 지금까지도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왕하10:1-13,대하9:1-12).
솔로몬이 기록한 잠언서나 전도서를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지혜로운 사람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두 여인이 서로 자기 아이라고 싸우는 사건을 솔로몬이 칼로 어린 애기를 둘로 쪼개어 서로 나눠가지라는 판결은(왕상3:16-28),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솔로몬의 이런 명성 때문에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를 무척 존경했다. 그리고 지혜로운 왕이라 하여 모든 것을 맡기고 충성을 다했다. 솔로몬의 치적은 역대 왕 중에서 최고를 자랑한다. 그 후로도 그의 명성은 후대까지 이어져 이스라엘 백성들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이스라엘 2천년 역사가 끝나갈 즈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 땅에 보내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솔로몬 왕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왕이나 선지자들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훨씬 더 못한 자로 여겼다. 솔로몬이 아무리 지혜로운 왕이라고는 하나 그는 어디까지나 장차 왕으로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에 불과한 자이다. 선지자들이 또한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고 재주가 많다 해도 그들 역시 장차 선지자의 모습으로 오실 그리스도 모형에 불과한 자들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인간들이 이런 사실을 모르고 하나님 손에 붙잡혀 잠시 쓰임 받은 인물들을 동경하며 하나님 보낸 아들을 그들의 발등의 때만도 못하게 여겼던 것이다.
구약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아무리 그 재주가 뛰어나고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능력을 받았다 하더라도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권세를 뛰어 넘을 수 없다. 구약에 등장하는 왕이나 선지자 그리고 제사장들은 모두 율법 아래 살고 있는 종이요, 죄인들이다. 하나님께서 그런 자들을 잠시 도구로 사용하신 것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미리 맛보게 해주신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어리석은 인간들이 자신들을 죄에서 구원해줄 아들을 믿으려 하지 않고 계속해서 조상들을 흠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히브리서는 이를 두고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히10:9)!”고 말하고 있다.
인간들이 하나님께서 첫 것으로 주신 모형 아래서 살 때는 둘째 것을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에 첫 것으로 주신 것을 온전한 것이라 믿고 그 안에서 자꾸만 안주하려고 한다. 가령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주었을 때, 유대인들은 그것이 자신들을 온전케 하는 법이라 생각하고 더 이상 어느 누구의 말도 믿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도 믿지 않았던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단(애굽) 손아귀에서 빼내오는 어마어마한 일을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줄 수는 없다. 그는 잠시 하나님 손에 붙들려 쓰임 받은 도구에 불과한 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당시와 후세 유대인들은 모세를 위대한 인물로 묘사하여 끊임없이 그를 동경하고 흠모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를 존경하고 흠모해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줄 수 있는 안식은 아무 것도 없다. 왜냐하면 모세 또한 죄인이며 죄 아래 살고 있는 인간의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인간들은 눈앞에 나타난 하나님 아들을 믿기보다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옛 사람들을 더 동경하며 흠모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눈앞에 나타난 하나님 아들은 거짓으로 믿을 수가 없고 실체를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하나님 아들을 믿는다고 말해놓고 아들 뜻대로 살지 않으면 당장에 거짓이 탄로 나고 만다. 그러나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인물들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말로 해도 거짓이 탄로 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계속해서 이러한 인물들을 흠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입만 살아 있을 뿐 실상은 모두 거짓으로 믿는 자들이다.
이스라엘 2천년 역사 가운데 적어도 예수가 오시기 전까지 일어났던 모든 사건은 전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주신 것들이다.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말라기 선지자까지 하나님 손에 붙들려 일했던 사람들 모두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사실을 망각하고, 조상들의 치적을 더 크게 내세우며, 정작 하나님이 보낸 아들에 대해서는 조상들의 발등에 때만도 못하게 여겼던 것이다. 이런 암담한 현실 속에 예수가 오셨으니, 그들이 예수를 믿지 못했던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 아들은 종들과 달리 인간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시는 분이시다. 종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사단 손에서 하나님 백성들을 빼내오는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하나님 아들은 하나님 백성들의 죄를 사하고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역할을 하신다. 이것이 바로 종들과 하나님 아들이 하는 일이 각각 다른 점이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이제 겨우 땅에서 종들을 통해서 하나님 백성이 된 것을 가지고 구원 받았다고 우쭐되게 되면 스스로 자신(사단)에게 속고 말게 된다. 이런 일은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기독교인들 역시 지금까지 성령의 법 아래 살고 있는 종들에 불과하고 똑같은 죄인들이며 그리스도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 기독교들이 예수 이름을 부르고 성령을 받아 하나님 백성이 되고 나면, 자신들도 곧 바로 ‘구원’에 이르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여전히 죄인의 신분이다.
지금까지 기독교 2천년 역사 가운데 일어났던 사건들 또한 모두 장차 오실 영적인 그리스도 모형으로 주어진 것들이다. 초대 교회로부터 시작한 기독교 역사 속에서 수 많은 믿음의 일꾼들이 남기고 간 발자취 역시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 쉽게 말해서 모세가 하나님 집에서 사환 노릇을 했듯이 오늘날 성령으로 쓰임 받은 믿음의 일꾼(목사)들 또한 하나님 집에서 사환을 노릇을 한 것이다. 사환은 아들이 아니고 종의 신분이다. 종은 하나님 앞에 아무리 크게 쓰임 받은 자라도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할 수 없다. 따라서 종은 오직 주인의 처분만 기다릴 뿐이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누가복음 17: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으로 다시 오시는 하나님 아들을 믿기보다는 자꾸만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과 그리고 기독교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들만 흠모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 눈앞에 나타난 예수를 믿기보다는 모세나 엘리야를 더 동경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말라기 선지자를 끝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 말씀이 들려오지 앉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절부절 못한다. 혹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리지 않았나 싶어서다. 그러나 믿는 백성들에게 하나님 말씀이 들려오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을 떠났다는 말이다. 믿는 백성이 하나님 말씀 없이 사는 것은 암흑 속에서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때 어둠을 밝히는 한줄기 빛이 광야에서 들려왔다. 바로 세례 요한이 회개를 외치며 나타난 것이다.
그동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줄 알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모두가 세례 요한 앞으로 달려 나와서 세례를 받는다. 그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도 세례를 받으러 달려 나오는 것을 보고 요한은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3:7-9)”하며 요한은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향해서 엄청난 비난을 퍼붓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종들이 하는 일이다.
침례 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태어난 자이다. 그는 태어나서도 줄 곳 광야에서 생활했던 모양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낙타 털옷에 먹는 음식도 석청만 먹고 살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또한 그는 요단강에서 예수님에게 침례를 베풀어 성령이 그의 머리위로 내려오심을 보고 그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요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어린양임을 세상에 처음으로 증거한 자이다.
그런 그가 당시 유대 왕이었던 헤롯이 자기 동생의 아내를 불법으로 취하는 것을 보고 바른 소리를 하다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당시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옥에 갇힌 그를 방문하자 요한은 예수께 가서 이렇게 물어보라며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며 전혀 요한답지 않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침례 요한에 대하여는 여자가 난자 중에서 가장 큰 자라고 일컫던 자인데 왜 그는 그런 터무니없는 질문을 하였을까? 종의 사역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종은 주인의 뜻을 전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자기 임무가 끝나고 나면 다시 육신으로 돌아가서 사람의 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침례 요한 역시 이미 자기 임무가 끝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에게서 하나님의 능력(은사)을 거두어 가셨다. 따라서 그는 이미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런 질문을 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종들이라면 세례 요한처럼 인간들 눈치 보지 말고 교만한 자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분노를 표출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는 요한처럼 하나님의 분노를 표출하는 자들이 없다. 이는 바로 참 종이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보내지 않는 종들은 육신의 생각으로 목회하는 자들이라 사람들 비위 맞추기에 급급하다. 그래서 그런 자들은 항상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한다. 성도들 또한 그런 말에 길들여져 있어서 누가 조금만 자기 기분을 상하게 하면 금방 토라져서 교회도 나오지 않는다.
이런 달콤한 말에 길들여진 기독교인들 앞에 예수께서 도적같이 오셔서 기독교인들의 죄악을 지적하신다면, 과연 기독교인들이 그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겠는가? 아마도 불쾌하고 자존심이 상한다며 단 번에 그를 욕하고 돌아설 것이다. 하물며 목사들이 지적하는 말을 듣고도 시험 들었다며 교회를 나오지 않는데,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은 인간의 폐부를 도려내는 말씀인데, 그 말씀을 듣고 기분 좋게 나올 사람은 없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인의 현실이다. 지도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기독교인들도 배나 지옥 자식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일반 교회에서 목사들이 전하는 말은 고작해야 성경을 읽고 그것을 육신의 생각으로 풀어주는 것이 전부다. 따라서 이런 말은 아무리 들어도 믿음이 자라지 않을 뿐 아니라 속사람도 변하지 않는다. 육신의 생각으로 전하는 말속에는 생명이 없다. 그래서 이런 말을 듣고 신앙생활 한 사람들 마음속에는 생명이 없는 것이다. 오늘날 믿는 자들 마음속에 생명이 없는 이유는, 바로 말씀을 전하는 자들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없이 전하는 말씀은 아무리 은혜가 되는 말씀이라도 영혼을 살리는 말씀이 아니기 때문에, 기독교인의 속사람 또한 변화되지 않는다.
기독교인들이 종의 신분이 아니고, 그리스도로 거듭난 하나님 아들들이라면 이 세상은 벌써 불길 속에 사라지고 없어져야 했다. 그러나 아직도 이 세상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직 기독교인들 앞에 하나님 아들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증거다. 계시록 말씀대로 하나님 아들들이 나타나서 천국복음을 전하게 되면 이 세상은 곧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땅 끝까지 천국복음이 전해지고 나면 악이 관영한 이 세상은 불길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하나님 아들들이 전해주는 천국복음을 듣고 영적으로 오신 아들을 믿는 자는 알곡으로 인침을 받을 것이나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쭉정이로 분류되어 불사름이 될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아직도 성령의 법아래 살고 죄인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자신들 입장에서는 죄인이 아니라 구원 받은 하나님 자녀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린다고 하여 해가 가려지지 않는다.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은 틀림없이 율법으로 구원 받았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예수가 오시고 나자 그들의 거짓이 백일하에 모두 드러나고 말았다. 기독교인들 속에서는 이런 자가 한 명이라도 나와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기독교인들이 죄인이 아니고 온전한 하나님 아들들이라면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날마다 성령을 거역하고 살아가는 죄인들이라서 기독교인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영적인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야 한다. 사람을 통해서 인격적으로 오시는 하나님 아들을 믿기만 하면 이방인들은 지금까지 자신이 어떤 종교에 몸담고 있었던 간에 상관없이 모든 죄를 사함 받고 영생에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은 구원 받았다고 끝까지 우기는 사람들과 자신의 선행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려는 사람들은 아들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임하게 될 것이다.
유대인들이 분명히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보내준 아들을 믿지 않아 히틀러에게 끌려가 600백만 명이 학살당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내린 끔찍한 형벌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영적인 백성들이라 하나님께서 이방인들 앞에 보낸 영적인 아들을 믿지 않았을 때, 저들 보다 훨씬 더 무서운 형벌에 처해질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