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은사와 그리스도 사랑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말하다가 갑자기 13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왜 바울은 성령의 은사와 그리스도 사랑을 구분지어 설명하고 있는 것인가? 이는 성령의 은사와 그리스도의 사랑이 똑같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주기 위해서다. 또한 바울은 성령과 그리스도 영이 동일한 영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 증거를 고린도전서 12장과 13장에서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도 성령은 아버지 영이요 하나님 영이라고 성경 여러 곳에서 말하고 있다. 성령이 아버지 영이라면 그리스도 영은 아들의 영이다.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양자의 영(롬8:15)’을 받아야 하나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했던 말도 바로 그리스도 영을 두고 한 말이다.
성령의 은사는 기독교인들이 성령의 법 아래서 장차 이방인들 앞에 영적인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신앙생활을 지속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이를 모르고 성령(율법)으로 모두 구원받았다고 믿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할 일이다. 이는 마치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믿던 것과 같은 이치다. 기독교인들의 이런 착각은 마귀로 하여금 거짓을 사실로 믿게 만들어서 영영 마귀 손아귀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바울은 기독교인들에게 성령의 은사로 주신 것들 모두가 그리스도의 각 지체임을 말하고 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12:12). 이를 해석하면 그리스도의 몸에 있는 여러 지체가 있는데 어떤 자에게는 그리스도의 몸통 역할을 하는 은사를 주셨고, 어떤 자에게는 그리스도의 손발 역할을 하는 은사를 주셨으며, 또 다른 자에게는 그리스도의 머리 역할을 하는 은사를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지체를 각 사람들에게 나눠주신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이런 은사를 받았다고 하여 그리스도의 온전한 것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령이 기독교인들에게 영적인 율법(마음속에 주신 법)역할을 하고 있다면, 성령의 은사는 장차 이방인들 앞에 오실 영적인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받은 성령의 은사는 장차 이방인들 앞에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온전한 것에 참여하려면 장차 이방인들 앞에 영으로 오시는 아들을 믿고, 그리스도로 거듭나야 비로소 온전한 것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만약 기독교인들에게 주신 성령의 은사가 그리스도의 실체라면 사도 바울은 괜히 쓸데없는 말씀을 나열한 것이 된다. 즉 기독교인들이 성령의 은사로 그리스도의 온전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 것 같았으면 바울은 굳이 고린도전서 13장을 기록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바울은 성령의 은사가 그리스도의 온전한 것이 아니므로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성령의 은사는 그리스도의 각 지체를 부분적으로 나눠준 것에 불과하므로 그것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온전한 사랑을 실천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의 온전한 사랑을 실천하려면 영으로 오시는 아들을 믿고 그리스도로 거듭나야만 가능해진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3:1-3)
바울의 이 말은 곧 성령의 은사로 제 아무리 큰 능력을 나타내고 또한 하늘에서 불을 끌어내리는 이적을 보인다 할지라도 결국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성령의 은사와 그리스도의 사랑이 결코 비교되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다. 바울의 고백은 한마디로 그리스도 없이 주의 일을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이다. 또한 오늘날 주의 종들이 성령의 은사로 설교를 하고, 복음을 전하고, 병든 자를 고쳐주며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살라서 남을 이롭게 한들 자신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없다면 자신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령의 은사는 그리스도의 실체가 아니라 모형에 불과하기 때문에 성령의 은사를 받은 것만으로는 자신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아파트를 분양하기 위하여 모델하우스로 지은 거푸집과 실제로 지은 아파트를 비교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렇다고 하여 성령을 무시하고 그리스도를 더 위에 두자는 말이 아니다. 성령과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기독교인에게 알맞은 영적 율법과 영적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현재 성령의 법 아래 사는 기독교인들은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없다. 성령은 그리스도 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라서 성령의 법으로는 기독교인들이 결코 거듭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거듭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법은 인간의 죄를 깨닫게 할 뿐 인간을 거듭나게 하지 못한다고 성경은 누차 강조하고 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으로 거듭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거듭났다고 믿고 있다가 예수를 믿지 못하여 멸망으로 가고 말았다.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저들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생각을 버려야 할 것이다.
예수 당시 자신을 거룩하다고 일컫던 바리새인들이 세리와 창기들을 불쌍히 여기지 못하고 그들을 멀리하고 정죄했던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인들 역시 같은 형제들을 자신의 교리와 맞지 않는다고 하여 무조건 이단으로 정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불신자들에게는 마귀새끼라며 상종도 안 하고 있다. 이는 기독교인들이 아직도 그리스도로 거듭나지 못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바울은 다음 말씀에서 ‘사랑’과 ‘은사’ 부분을 명확히 구분지어 말하고 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그리스도)이 올 때에는 부분적(은사)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고린도전서 13:8-10)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속에 들어왔을 때 우리가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13:11)!”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성령의 법 아래서 신앙생활 하는 것은 마치 바울이 예수를 만나기 전 율법 아래서 신앙생활 하던 때와 같은 이치다. 바울도 그 당시 기고만장하여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마냥 날뛰었지만, 그가 예수를 만나고 보니 자신의 존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동안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운 모든 학문과 모든 지식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다. 그리고 그동안 아무것도 모르고 날 뛰던 자신의 행동을 깊이 뉘우치며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딤전1:15)’로 대변한다. 이것이 진정 그리스도로 거듭난 자의 모습이다.
그러나 바울처럼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양자의 영(그리스도 영)을 받은 자는 자기 생각이나 혹은 자신이 속해 있는 교단 교리와 맞지 않는다고 하여 인간들을 함부로 정죄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영을 받은 자는 예수께서 죄인들을 불쌍히 여겼던 것처럼 누구든지 자신이 성령을 거역한 죄인이라며 손들고 오는 자들을 사랑한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불신자로 살던 자라도 자신의 죄를 깨닫고 아들 앞으로 달려 나오기만 하면 그들의 모든 죄까지도 사해줘서 천국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거듭난 자가 펼치는 구원 사역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남의 잘못을 먼저 보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부터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남의 눈에 티를 먼저 빼려고 할 것이 아니라 내 눈 속에 들어있는 들보를 먼저 빼내야 한다는 것이다(눅6:42). 성령의 은사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치료할 수 있는 권능을 받았다 할지라도 자기 눈에서 먼저 들보를 빼내지 않는 자는 결국 교만함으로 스스로 무너지고 말게 된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의 큰 은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교만해져 스스로 멸망의 길을 자초하게 되었는가를 우리는 수도 없이 보아왔다. 기독교인들에게 주신 성령의 은사는 불신자들에게 표적을 보여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예수를 믿게 해서 이 땅에서 하나님 백성들을 만들 목적으로 주신 것이지 결코 구원 받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따라서 성령의 은사는 원래 자기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에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다시 회수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교만한 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은사를 회수당하고 나자, 교회나 기도원에서 귀신을 쫓아낸다며 별의별 해괴망측한 짓을 다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자신이 철저하게 죄인이란 사실을 알고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런 교만함과는 거리가 멀다. 홀아비가 과부의 심정을 안다는 우리 속담처럼 자신이 별 볼일 없는 죄인이란 사실을 깨닫고 있는 자는 교만한 곳에 서기 보다는 낮은 곳에서 살아가기를 자청한다.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말이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란 바로 이런 바탕위에 세워져야 비로소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교회 일에는 열심을 내지만,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에는 바리새인들처럼 인색하다. 남의 심정을 헤아려보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며 그런 자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바른길로 안내할 수 있겠는가?
바울이 성령의 은사와 비교하여 그리스도 사랑을 기록한 것도 바로 이런 내용을 바로잡기 위해서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3). 이 말을 직역하면 기독교인들이 그동안 길거리에서 노숙자들에게 밥 퍼주는 일을 하고, 또는 불쌍한 사람들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도와주었다 할지라도 “내 속에 그리스도가 없으면 아무 유익을 없다”고 하는 것이다.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없이 하는 일 모두가 육신적인 사랑을 전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일도 하나님 백성을 만들기 위한 전도 차원이라면 아주 좋은 효과를 볼 수도 있다.
바울이 말하듯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성령의 은사로 주신 것들은 다 변할 수 있고 다 폐해버릴 수 있어도, 그리스도의 사랑만은 절대 변치 않는다고 말한다. 그만큼 그리스도의 사랑이 영원불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은 나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나를 값 없이 내어주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예수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셨다는 것을 예로 들어 자신들이 하는 일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정당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께서 떡을 나눠준 사건은 사흘이나 굶주린 그들의 배고픔을 달래주기 위해서 먹을 것을 나눠준 것이지 그들에게 결코 떡이나 물고기를 나눠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을 뒷받침 하는 것이 바로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마16:6)”고 하시는 말씀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기독교인들 앞에 보내주시는 목적은 인간들을 죄에서 구원하고자 함이지, 결코 굶주린 인간들에게 밥을 제공하거나 또는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라고 보내주시는 것이 아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밥을 주실 수도 있고 불쌍한 사람들을 돌봐주실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 아들이 오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오직 성령의 법을 거역한 기독교인들과 양심의 법을 어긴 이방인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마지막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려면 내가 누구인가를 먼저 깨달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다. “나를 먼저 깨달아야 한다”는 말은 결국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즉 내가 먼저 죽지 않으면 그리스도로 거듭날 수가 없고, 그리스도로 거듭나지 못하게 되면 결국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란 남의 심정을 먼저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내가 먼저 배고픈 것을 경험했다면 상대방에 대해서도 배고픈 사실을 깨닫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바로 배고픈 사람의 심정을 헤아려서 배려를 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같은 원리로 자신이 먼저 죄인이란 사실을 깨닫고 있는 자는 상대방 또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며 그를 불쌍히 여길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실들을 모두 배제하고 무조건 불쌍한 사람들을 데려다 밥이나 먹여주고, 잠이나 재워 준다고 해서 그것을 모두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불신자나 다른 종교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불쌍한 사람들을 데려다가 돌볼 수도 있고, 또한 그들에게 편안한 안식처를 제공해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은 불쌍한 사람들을 데려다가 밥 먹여주고 잠재워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여, 그리스도의 품에 들어가 영원토록 그리스도의 은혜로 살아가도록 안내해 주는 것이다.
만약 기독교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밥을 나눠주고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말한다면, 기독교인들 앞에 그리스도가 굳이 다시 오실 필요가 없다. 기독교인들이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일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말하지 말고, 차라리 하나님 백성 만들기 위한 전도 차원에서 이런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육신의 일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은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마16:6)”는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성령 아래서 여러 가지 은사를 받아 큰 이적과 표적을 나타나기도 한다. 귀신을 쫓아내기도 하고 많은 병들을 고쳐주기도 한다. 고아원, 양로원 할 것 없이 불쌍한 사람들을 무조건적으로 도와주기도 한다. 나도 그리스도 영을 받기 전까지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인 줄 알았다. 하지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어느 날 갑자기 빛으로 찾아오신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후부터는 성령과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이 성령의 은사로 말미암아 개개인적으로 신앙생활 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기도 하고 또는 은사를 통해서 남에게 많은 유익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성령의 은사는 어디까지나 영적인 아들이 올 때까지만 그리스도의 부분적인 것들을 기독교인들에게 보여줄 뿐 온전한 것이 아니므로, 기독교인들은 성령의 은사를 그리스도의 전부라고 생각하여 구원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바울도 이런 내용을 누차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현재는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부분적으로 그리스도를 맛보고 있지만, 장차 하나님께서 이방인들 앞에도 영적인 아들을 보내주시면 그때는 기독교인들도 은사로 하던 것들을 모두 폐하고 그리스도 영으로 말미암아 온전한 것을 맛보게 될 것이다.
이를 두고 바울은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로 온전히 거듭나게 되는 과정이다.
이것은 내가 그동안 성령과 그리스도 영을 받고 체험한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 글을 읽는 분들께서는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후 지금까지 내가 얻은 결론은 기독교인들 모두가 영으로 오시는 하나님 아들을 믿고, 그리스도로 거듭나야 비로소 온전한 구원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를 두고 예수께서도 몇 번이나 성경에서 이방인들 앞에 다시 가겠다고 말씀하고 있다.
하늘 보좌에 영으로 계신 예수께서 이방인들 앞에 오실 때는 사람을 통해서 오시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를 두고 도적같이 오신다고 말한다. 바울이 빛으로 찾아오신 예수를 만나고 나서 그가 그리스도 사역을 펼쳤던 것처럼, 이방인들 앞에 오시는 그리스도 역시 바울 같은 자를 통해서 오시는 것이다. 혹시 기독교인들이 영화에 나오는 예수를 생각하여 이방인들 앞에 오시는 아들도 그런 모습으로 오지 않을까 생각하다가는 십중팔구 거짓 목사와 적그리스도 영을 받은 자에게 속을 수 있다.
우리 속담에 “소문난 잔치에 먹을 없고 요란한 깡통이 소리가 크다”는 말이 있다. 속이 비어있을수록 요란한 소리를 낸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그리스도로 거듭나지 못한 교회일수록 건물 내부를 화려하게 꾸며서 그런 것들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다. 그리고 말씀을 전하는 목사들 역시 그리스도가 마음속에 없는 자들일수록 겉모습을 후덕하고 인자하게 꾸민 다음 달콤한 말로 영혼들을 미혹하고 있다. 또한 세상 지식이나 학문 따위로 성경을 잣대질하는 자들도 모두 마찬가지다. 이렇게 거짓 목사들이 전하는 달콤한 말에 넘어가는 자들은 결국 자기 영혼을 마귀에게 팔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하나님 아들은 결코 인간들에게 달콤한 말을 전하지 않는다. 현재 기독교인들 모두가 성령을 거역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야 하는데 어떻게 달콤한 말로 교인들에게 구원 받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기독교인들 앞에 오시는 하나님 아들은 먼저 기독교인들에게 성령을 거역한 죄에 대하여 물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속에 숨은 악령의 정체 또한 드러낼 것이다. 그때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하는 자들은 아들 앞을 떠날 것이나 자신의 정체를 악한 존재로 시인하는 자들은 아들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결국 기독교인들 모두가 울리는 꽹과리가 되지 않으려면, 장차 이방인들 앞에 오실 하나님 아들을 믿고 모두가 그리스도로 거듭나야 비로소 속이 꽉 찬 알토란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성령의 법 아래서는 누가 알곡이고 누가 쭉정인지 아직 알 수 없다. 이를 알 수 있는 방법은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어느 누가 아들을 믿고 나오느냐에 따라서 알곡이 될 수도 있고 또한 쭉정이로 전략할 수도 있다. 율법 아래 살던 유대인들도 결국 예수가 오시고 난 뒤에서야 비로소 알곡과 쭉정이를 알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