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비유(1)
성경을 보면 예수께서 비유가 아니면 어느 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하시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럼 예수께서는 왜 비유로 말씀하시를 좋아하셨던가? 그것은 한마디로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하늘나라, 즉 영적인 세계를 깨달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비유로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것을 두고 오늘날 성경학자들은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고서 하는 말이다.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은 인간으로서는 처음부터 알아들을 수가 없다. 땅에서 태어난 인간이 하늘에서 오신 분의 뜻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나님은 영으로 계신 분이시다. 그런 분이 인간들 앞에 나타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구약에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들 앞에 나타나셨던 것은 모두 천사들이 현현한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들 앞에 최초의 모습을 드러내신 것은 바로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다.
그렇게 하늘에서 오신 분의 말씀을 인간들이 듣고 쉽게 이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최대한 인간들로 하여금 깨달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 세상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어리석은 인간들은 성경을 보면서 그것을 깨달아보겠다고 발버둥을 치고 있다. 인간의 지식으로 그것을 깨달으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하나님 앞에 더 교만해진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알량한 지식이 예수보다 낫다고 여겼기 때문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인간들 앞에 나타나시니 그를 우습게보고 그렇게 버르장머리 없는 짓을 일삼았던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은 예수 믿고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대단한 존재로 여기고 있지만, 실상은 모두가 죄 아래 살고 있는 자들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경에 보면 천국의 비유가 복음서 이곳저곳에 많이 등장하고 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부터 시작하여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이야기까지 천국에 대한 비유가 다양하게 소개되고 있다. 이러한 비유는 오늘날 교회만 다니면 모두가 천국 갈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말씀이라 할 수 있겠다.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 임금께서는 자신의 종들을 보내어 혼인잔치에 초청하기로 한 사람들을 불러오라고 명한다. 그런데 그 청한 사람들이 오기를 싫어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임금이 생각하기를 혹시 그들이 혼인잔치에 오는 것이 부담이 되어서 안 오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혼인잔치에 별로 먹을 것이 없어서 안 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여 이번에는 다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고 나의 살진 소와 여러 가지 맛있는 음식들을 푸짐하게 준비했으니 아무 부담 없이 혼인잔치에 오라”고 한다. 그러나 저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혹 그중에서 말씀을 듣는 자가 있더라도 각자 할 일이 많다며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 자리를 피하더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악랄하고 못된 자들은 자꾸만 자신들을 귀찮게 군다며 종들을 잡아 죽여 버리더라는 것이다. 이에 화가 난 임금은 당장에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라고 명령하신다. 여기에 등장하는 임금은 곧 하나님이요, 아들은 예수님이다. 그리고 임금이 보낸 종들은 선지자들이다. 혼인잔치는 하나님 아들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결혼을 의미하는 말이며 청함을 받았던 사람들은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그런데 청함을 받았던 사람들이 혼인잔치에 오기를 싫어하더라는 것이다. 왜 그들은 즐거운 혼인잔치에 오기를 싫어했을까? 그 이유는 바로 자신들은 이미 하나님 자녀들로 인정받은 사람들인데 뭔 놈에 혼인잔치를 또 하느냐는 것이다. 그래도 자신이 하나님 아들이라는데 좀 양심에 가책을 느끼는 자들은 임금이 보낸 종들 앞에서 밭 갈로 가야한다며 모두 제 갈 길로 가고 말았지만 이미 자신을 하나님의 성민으로 자처하던 자들은 자꾸만 귀찮게 구는 종들을 도리어 잡아 죽여 버렸던 것이다.
이런 사실들은 이미 성경과 이스라엘 역사가 그것을 생생하게 증명해주고 있으니까 오늘날 교회를 다니고 있는 자들이라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들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은 이 말씀과 관련하여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14절에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고 하니까 기독교인들이 생각하기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안 믿었기 때문에 택함을 못 입은 자들이고 자신들(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택함을 입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자들이 많다. 그러나 이것은 크나큰 오산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인들 역시 아직은 어느 누구도 예복을 입은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복은 오직 하나님 아들을 통해서만 선물로 받을 수 있는 것인데, 개, 돼지처럼 살던 이방인의 삶에서 전도를 받아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 이름을 믿고 이제 겨우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이 되어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것에 불과한데, 벌써 결혼 예복을 입은 것처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보통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런 생각으로 살다가 예수를 믿지 않아서 멸망으로 갔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방인들이 하나님 백성이 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임금은 다시 종들에게 일러 사거리 길에 가서 만나는 대로 사람들을 데려오라 말씀하신다. 종들이 사방팔방으로 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데려오다 보니 그 속에는 악한 자도 있고, 선한 자도 섞여 있더라는 것이다. 이것은 곧 오늘날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전도자들이 물불가리지 않고 만나는 사람마다 전도를 해서 사람들을 데려오다 보니 교회 안에 사람 수가 많은 것과 같다. 그 속에는 어쩔 수 없이 가족들에 의해서 교회 끌려나온 자도 있고, 친구 체면 때문에 마지못해서 교회 나온 자도 있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고 교회나 오는 자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 중에는 정말로 양심에 가책을 느껴 교회 문을 두드린 자도 있을 것이다. 이것을 두고 악한 자나 선한 자나 교회 안에 손님이 가득하다고 하는 것이다.
아무튼 개, 돼지처럼 살던 이방인들이 어떤 이유에서 교회를 나왔던 간에 적어도 저들 모두는 하나님 아들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것만은 사실이다. 문제는 임금으로부터 쫓겨나지 않으려면 결혼예복을 입어야 하는데, 그 예복을 어디서 구해 입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아무리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았다하더라도 결혼예복을 입지 않고서는 그 결혼식장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예복은 어디서 누구에게 구해 입어야 하는가? 바로 하나님 아들로 말미암지 않고는 누구도 그 예복을 얻어 입을 수 없다.
사실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모두가 자신들은 택함을 받은 백성들이요 이미 결혼예복을 입은 사람들처럼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공중에 재림하면 모두가 공중에 들림 받을 것에만 마음이 들떠 있다. 아니 이들 앞에 아직 아들이 오신 적이 없는데 어디서 예복을 구해 입었다는 말인가? 혹시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성령은 아버지의 본질의 영이다. 아버지의 영을 어떻게 아들의 영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바로 이런 착각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인들 모두가 벌써 그리스도의 예복을 입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 앞에 아직 그리스도는 오시지 아니했다. 그런데 아버지의 성령을 아들의 영으로 착각하여 자신 속에도 아들의 영이 내주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눈뜬 소경이 아닐 수 없다. 바리새인들이 두 눈을 뜨고도 예수를 보면서도 믿지 않았던 것은, 바로 자신을 하나님의 성민으로 과대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눈을 씻고 찾아봐도 아직 기독교인들 속에 아들이 영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만약 기독교인들 속에 아들의 영이 계셨다면 현재와 같이 타락한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성령은 믿는 자들에게 법을 주셔서 인간들로 하여금 죄를 지적해 주시는 분이지만 그리스도는 인간들이 범한 죄를 스스로 감당하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그리스도로 거듭난 자들이라면 마땅히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나 어느 누가 자신을 희생하려고 하는가? 희생은 고사하고 자신에게 조금만 불이익이 닥쳐도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물불 가리고 달려들지 않던가? 이것만 보아도 누가 천국을 소유한 자인지 아닌 자인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택함을 입었다는 말은 그리스도로 거듭난 자들을 두고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부자와 거지의 비유는 누구 천국에 갈 수 있느냐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이스라엘 땅에 한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날마다 좋은 옷과 좋은 음식을 먹으며 호화로이 연회를 베풀며 가까운 사람들을 불러다가 마음껏 쾌락을 즐기며 살고 있었다. 그는 재물이 넉넉하니 이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전혀 없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런데 날마다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사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거지였다. 이 거지는 얼마나 비참한 신세였는지 자신의 몸에 난 상처마저도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부자의 대문 밖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있을 때 그 헌데를 개들이 와서 핥더라는 것이다.
이렇게 부자와 거지는 이 땅에서 철저히 대조되는 삶을 살다가 둘 다 죽어서 사후 세계를 맞이하게 된다. 아마도 부자는 자신 역시 이 땅에서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열심을 했으니까 천국에 갈 것으로 여겼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가 도착한 곳은 천국이 아니라 물 한 모금도 제대로 마실 수 없는 유황 불속이었던 모양이다. 그가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내 혀를 시원케 해달라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가 겪고 있는 고통이 장난이 아닌 모양이다.
우리들 상식으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내용이지만 아무튼 현실은 이렇다는 것을 주님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다시 한 번 말씀하고 계신다. 이렇게 부자와 거지의 삶을 극명하게 대조시켜 우리들에게 날마다 들려주고 있지만 오늘날 누구 하나 이런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우려 듣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당시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당연히 물질적인 부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대조시켜 말씀하셨다. 하지만 오늘날 영적으로 오신 주님은 눈에 보이는 물질을 많이 가진 자를 부자로 보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욕심과 정욕과 부를 내려놓지 못하고 이 순간에도 그것들을 손에 움켜쥐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 자들을 모두 부자로 보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죽지 못해 사는 자들을 거지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과연 부자들은 얼마나 되면 또한 거지들은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우선 불신자들의 삶을 살펴보면 그들은 당연히 부와 명예를 쫒아 눈에 쌍심지를 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 분이라는 걸 모르는 그들로서는 당연히 사후 세계가 보장 될 수 없기에 이 땅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잘 먹고 잘 살려고 발버둥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믿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 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는 자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성경에서 분명히 모든 것을 버려야 결국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자신들은 어느 것 하나도 버리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천국은 가고 싶어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믿는 자들이라면 당연히 성경을 한 번쯤 읽어보았을 것이고, 성경을 읽어보았다면 당연히 이 말씀도 읽어 보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 것을 좀처럼 버리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 당시는 육적인 시대라 예수께서 물질적인 비유를 예로 들어 부자와 거지의 삶을 통해서 천국관을 말씀하셨다면, 오늘날에는 영적인 시대라 그 비유 또한 당연히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온갖 욕심과 정욕들을 염두에 두고 부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 천국에 먼저 들어갈 것임을 주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분명하게 말씀 하시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마음속에 온갖 것들을 가득 담고 있는 부자들은 천지에 널려 있는데 비해서 마음이 가난한 자들은 눈을 씻고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설사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가 스스로 가난해지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러 이스라엘 땅에 육체를 입고 오셨던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영적으로 기독교인들 앞에 다시 오시겠다는 것이다. 인간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태어나면서부터 욕심을 가지고 태어나게 된다고 한다. 좋은 예로 갓난아기가 엄마 젖꼭지를 물고 있다가 젖이 안 나오면 순식간에 젖꼭지를 꽉 물어버리는데, 이게 바로 갓난아기가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본능적으로 그런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아기가 자라서 어떤 모습을 갖추게 되겠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다.
이렇게 많은 것을 마음속에 지닌 자들이 하루아침에 자신의 모든 것으로 버리고 주님을 믿으라고 하면 과연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믿을 수 있는 자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우리는 재물이 많아서 부자가 아니다. 자신들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것들을 보라! 얼마나 많은 것들이 나를 주님 앞으로 달려 나가지 못하고 있는가 말이다. 온갖 많은 생각은 결국 영적으로 말씀 하시는 주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육신의 생각에 젖어서 우물쭈물하다가 마귀가 살그머니 넣어 주는 생각에 밀려서 주님 말씀을 결국은 부정적으로 해석하고 버리지 않았던가?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사, 제사장들을 보라! 그들 역시 생각 같아서는 하나님 아들 앞에 나아가려고 어찌 발버둥치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그들이 땅에서 쌓은 고상한 지식으로 인해서 그것이 자신의 발목을 붙잡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사도 바울 역시 예수를 만나기 전, 자신이 가말리엘 랍비 학교에서 배운 그것으로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지만 그가 예수를 만난 후에는 그가 배운 고상한 지식들을 모두 배설물처럼 여긴다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그 알량한 지식으로 바울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를 짓고 있었던가?
인간이 이 땅에서 아무리 높은 학문을 배우고 고상한 지식을 습득한다 해도 그것은 죽은 자들 입장에서 보면 대단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마차바퀴에 묻어나는 먼지만도 못한 것들이다. 만약 인간이 이 세상에서 터득한 것들 중에서 단 한 가지라도 인간의 영혼을 위해서 유익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또 다시 이방인들 앞에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도 하나님 아들은 오셔서 인간의 부질없는 그것들을 모두 내려놓고 나를 쫓으라고 말씀 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끝까지 그것들을 내려놓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결국 자기 길을 가야 한다. 그가 가는 길이 아무리 좋게 보여도 결국 부자가 머물던 곳으로 가야 한다. 그는 그 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살아생전에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주장만 앞세우다 그렇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주님은 또 다시 우리들에게 묻는다. 부자로 살기는 원하는가? 아니면 거지로 살기를 원하는가? 따라서 부자로 살기를 원하는 자들은 세상에 나가서 마음껏 세상을 즐기며 살라는 것이다. 부도 얻고 명예도 얻어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봐 주기를 원하거든 마음껏 자기 욕심을 채우며 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영생을 하고 싶은 사람들은 거지 나사로처럼 세상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쫓으라고 말씀 하신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내가 부자로 살기는 원하는가 아니면 거지로 살기를 원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