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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것과 둘째 것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첫째 것으로 시작하여 둘째 것으로 끝난다. 첫째 것으로 주신 것은 모형이요 둘째 것으로 주신 것은 실체이다. 아담에게 가인과 아벨이 있었으나, 장자인 가인이 버림을 당하고 동생 아벨이 의의 자녀로 선택을 받았다. 또한 아브라함에게 아들 둘이 있었으나 장자인 이스마엘이 버림을 당하고, 동생 이삭이 약속의 자녀로 선택을 받았다. 그리고 이삭의 아내 리브가의 뱃속에 쌍둥이가 잉태 하였으나 그들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장자인 에서가 버림을 당하고 동생 야곱이 선택을 받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율법이 첫째 것에 해당된다면 복음은 율법을 완성시키기 위한 둘째 것에 해당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따라 애굽을 탈출하여 홍해바다를 건너고 바란 광야를 지나서 시내산에 도착하여 율법을 받은 것이 첫 것에 해당된다면, 여호수아를 따라 요단강을 건너고 여리고성을 지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둘째 것에 해당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소와 양을 잡아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는 행위가 첫 것에 해당된다면, 예수가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신 사건이 둘째 것에 해당된다. 그래서 예수께서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이 첫 것에 해당된다면 예수의 몸이 둘째 것에 해당된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한복음 2:19).

 

이러한 원리로 오늘날 성령은 기독교인들에게 ‘영적인 율법’ 역할을 하기 때문에 첫 것에 해당된다. 그리고 성령의 법을 완성시키러 오시는 ‘영적인 아들’이 둘째 것에 해당된다. 기독교인들의 예배 처소인 예배당이 첫 것에 해당된다면 예수가 영으로 오셔서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들어가는 것이 둘째 것에 해당된다. 오늘날 세상에 지어진 눈에 보이는 ‘유형교회’가 첫 것에 해당 된다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간의 마음속에 지어지는 ‘무형교회’가 둘째 것에 해당된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렇게 진행시키는 것은, 아담의 범죄로 모든 인간이 죄 아래 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깨닫게 할 목적으로 항상 첫 번째 것은 모형으로 주신다. 그런데 하나님 백성들이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알았더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를 배척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모르고 살다보니, 모두가 첫 것으로 주신 것을 실체로 믿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악한 영’이 인간을 속이고 모형으로 주신 것을 실체로 믿도록 속이는 것이다.

 

그 좋은 예가 바로 바리새인들이 율법으로 의롭게 되었다며 율법의 완성자로 오신 예수를 믿지 않고 배척했던 일이다. 바리새인들이 실체로 오신 예수를 믿지 않다보니, 계속해서 모형에 불과한 예루살렘 성전을 붙잡고 거기에 목을 매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실체가 오시기 전에는 모형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체가 오시고 난 후에는 모형은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어 폐기되고 만다.

 

히브리서 저자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히8:7)”라고 말한 이유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는 논리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잘못된 사상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 기록한 말씀이다.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첫 것에 안주하여 구원받았다고 하고 있었으니 같은 형제로서 얼마나 안타까웠겠는가? 그런 사실을 예수를 통해서야 비로소 알게 된 히브리서 저자는 자기 형제 동포들이 잘못된 논리에 빠져 멸망으로 가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는 또 다시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히10:9)라며 그가 첫째 것을 왜 폐해야 하며 그리고 왜 둘째 것이 필요한가를 역설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첫째 것을 모형으로 주시고 마지막에 온전한 것을 주신다. 하물며 인간들도 본 경기를 하기에 앞서서 먼저 충분한 연습을 한 후에 마지막에 본 경기를 펼친다. 그 이유는 인간들 모두가 죄악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법을 먼저 주신 후에 마지막에 온전한 것을 주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율법을 먼저 주신 후에 마지막에 복음을 주셨다.

 

이런 원리는 비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예수 이름으로 드리고 있는 예배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성경이 말하는 첫째 것(율법)에 해당된다. 여전히 기독교인들은 성령의 법 아래 갇힌 죄인들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제 곧 하나님께서 그 둘째 것(영적인 아들)을 기독교인들 앞에도 보내주시게 될 것이다. 그들은 둘째 것으로 오시는 영적인 아들을 믿어야 비로소 온전케 될 수 있다.

 

또한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것들이 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짝이란 모형과 실체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그 예로 구약과 신약이 짝이 되고, 율법과 복음이 짝이 되며, 이삭과 예수가 짝이 되며, 야곱과 영적인 그리스도가 짝이 되는 것이다. 구약은 첫 언약이요 신약은 새 언약이다. 또한 율법이 첫째 것이라면 복음이 둘째 것에 해당되고, 그리고 이삭이 첫째 것에 주신 모형이라면 예수가 온전한 둘째 것에 해당된다. 그리고 야곱은 장차 이방인들 앞에 영적으로 오실 첫째 것에 해당되며, 사람을 통해서 영적으로 오시는 그리스도가 그 두 번째 것이다. 명심해야 할 것은 첫 것으로 주신 것은 모형이요 둘째 것이 실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등잔 밑이 어둡다”는 우리 속담처럼 남의 것은 잘 보이는데 정작 자신의 것은 잘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를 직역하면, 오늘날 기독교인들 눈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율법과 복음은 잘 보이는데, 정작 자신들에게 주신 율법과 복음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를 두고 영적인 소경이요 어둠 속에 살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바울도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바리새인으로서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자였으나, 그가 다메섹 도상으로 찾아오신 예수를 만나고 난 후에는 완전히 변하여 이방인들에게 아주 구구절절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가 기록한 말씀 중에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13:9-10)”는 구절이 있다. 위 말씀은 이방인들에게 해당되는데 성령의 은사로 주신 것들이 첫째 것에 해당되는 것이라면 바울이 기록한 위 말씀이 바로 둘째 것에 해당되는 말씀이다.

 

안타까운 사실은 기독교인들 또한 모형으로 주신 것들을 실체로 믿고 있다. 유대인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를 충분히 알았을 텐데 정작 자신들에게 적용할 때는, 첫째 것으로 주신 것들을 실체로 믿어버리는 것이다. 모형을 실체로 믿게 되면 설사 예수의 영을 받은 자가 와서 이런 사실을 알려준다 해도 기독교인들은 그런 사실을 믿지 않을 것이다. 이는 이미 악한 영이 그들을 속이고 구원받았다고 속삭이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예로 타 종교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자! 불교나 혹은 이슬람 사람들은 석가나 마호멧이 영생을 준다고 믿고 있다.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죽은 영이 그들에게 계속해서 석가나 마호멧이 영생을 줄 것이라고 속삭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두고 신념에 의한 믿음이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다른 종교를 믿으려면 인간의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속에서 죽은 영이 떠나지 않는 한 인간의 고정관념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 마음속에도 죽은 영이 존재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속에도 성령이 계신 줄 알고 있겠지만, 성령은 마음속에 오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의 영속에 오시는 분이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하늘에 오르셨던 예수가 영으로 오셔야 하는데, 현재 기독교인들 마음속에는 죄악이 가득하기 때문에, 예수 대신 죽은 영이 인간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이제 겨우 영적인 율법(성령)을 받은 것을 가지고 구원 받았다고 믿게 되면, 죽은 영이 인간을 속이고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주신 것들을 실체로 믿도록 유혹을 역사해서 구원받았다고 속이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는 이것이 바로 고정관념으로 자리 잡고 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독사의 자식들(마3:7,12:34,23:33,눅3:7)’이라고 욕설을 퍼부었던 것도 모두 이와 같은 원리 때문이다. 당시 바리새인들의 마음을 지배하던 죽은 영이 율법으로 의롭게 되었다며 예수를 믿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방해를 했던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결국 죽은 영이 자기 마음속에서 속삭여대는 바람에 예수를 믿지 못하고 그만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았다. 당시 바리새인들을 지배하고 있던 악한 영은 예수를 이단괴수로 몰아 죽이는 데 함께 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버팀목 역할을 해주던 예루살렘 성전과 율법만을 자신들의 최고의 법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새 날이 밝아 예수라는 새로운 성전과 새 계명을 주실 분이 오셨는데도 새로운 성전 앞으로 모여드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낡고 보잘 것 없는 예루살렘 성전으로만 모여들었다. 

 

하나님께서는 옛 시대에는 예루살렘 성전과 율법을 주어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성전에 나와서 제사를 지내게 하고 또한 율법을 지키게 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나오도록 하셨다. 하지만 그들이 법을 어기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이 성전에 나와 제사 드리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시던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에 머무시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다. 

예루살렘 성전을 버렸다는 말은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번 버린 성전에는 다시는 찾아가지 않는 분이 바로 하나님의 특성이시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다시는 예루살렘 성전과 율법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그것을 대처하기 위해서 예수가 오신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을 만나려 와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사람도 예수 앞에 오지 않고 도리어 버림 당한 예루살렘 성전만 찾더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우매함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새로운 성전이란 사실을 누구도 알 수 없었던 것은 자신들의 의로움으로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자신들을 볼 줄 몰랐기 때문이다.

 

이것을 성경을 통해서 바라보고 있는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의 실상은 어떠한가? 기독교인들이라고 해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당시 유대인들을 보면서 “바보 같은 사람들”이라고 모두들 손가락 하는데, 당시 유대인들도 자기 조상들이 광야 생활에서 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숭배하다 멸망한 사건과 노아 홍수 사건을 보면서 멸망한 자들을 비웃었다.

 

그러나 자신들이 오늘날 기독교인들로부터 비웃음을 당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후세사람들이 비웃지 않을까? 성령까지 받은 사람들이 멍청한 짓을 하고 있다고 조소를 금치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성령으로 자기 마음속을 비추어 보았다면 자신이 어떤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믿지 못하고 썩을 교회 건물에만 매달리고 있는 것이 어리석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더욱더 답답하다는 것은 기독교인들은 노아 홍수로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 민족들의 출애굽부터 가나안 땅에 이르는 광야 생활과 또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충돌 과정을 모두 성경을 통해서 보고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처지는 눈곱만큼도 살필 줄 모르고, 자신들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교회만 다니면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교회만 죽어라고 다녔다는 것이 어리석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전도 미련 없이 버리시는 분이라면, 아무리 예수님의 피 값으로 세운 교회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지 않는 예배당이라면 과감하게 버리시겠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도 없이 그저 입술만 살아서 예수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의 본질을 따라서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어두움만 가져다주는 그런 예배당이라면 예수께서도 그런 곳에 더 이상 머물러 있지 못하시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 역시 손으로 지은 예배당을 폐하고 다른 통로인 하나님 아들을 통해서만 인간들을 만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기독교인들은 당시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법에만 매달려서 예배당만 찾게 될 것이다. 성경이 우리들에게 바로 인간의 어리석음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 아래 살 때는 복음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살았다. 그들은 적어도 예수가 오시기 전까지 한 번도 복음이라는 것을 접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 어디를 봐도 복음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곳은 없다. 그러나 구약성경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메시아가 와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실 것인가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 앞에 막상 예수가 오셨지만 그들은 예수를 죄인의 친구 혹은 이단괴수라 하여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이 아무리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백성이라지만, 그들 역시 율법 아래 사는 죄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죄 아래 사는 사람들로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이런 폐단이 생기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구약 성경이 첫 것에 해당되는 말씀이다. 그리고 예수가 오심으로 말미암아 신약 성경을 통해 구약을 완성시켜 주셨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는 신약 성경이 장차 이방인들 앞에 오실 영적인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주신 말씀이다. 따라서 앞으로 영적인 그리스도가 이방인들 앞에 오셔서 신약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완성시켜 주실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들에게 적용되는 영적인 복음이다. 그리고 영적인 그리스도가 오셔서 하시는 이 말씀이 기독교인들을 구원에 이르게 할 지침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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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양평군 용문읍 삼성리 584-1 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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